착한 소매치기와 피사의 종소리-,그리고 친퀘테레
몬테카티니에서 피사까지는 1시간 거리.
한국행 비행장이 있는 밀라노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오늘도 여전히 먹구름과 함께 출발! 피사쪽은 환하게 하늘이 터져 있다
고속도로를 달린 운전기사는
어김없이 통행료와 관련한 거리를 check하러 정산소에 내린다
피사에 도착 대 성당으로 향했다
기적의 광장이라는 별칭의 두오모광장에는 사탑, 세례당, 납골당 등이 함께 있다.
산 조반니 세례당 (Battistero di Pisa)-,두오모 성당 건축 이후 건축했다.
피사 대성당 정문
피사, 두오모-,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로마네스크양식.
성당의 설교단은 지오바니 바시니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고딕양식 작품 중 최고.
피사 대성당 (cattedrale di Pisa)은 로마네스크와 피사 양식의 성당으로
정면이 4개의 기둥인 것이 특징
사탑등 모든 입장권 판매장- 대성당 경내에 있다.
티켓을 구매한 후 이곳에 가방등을 보관해야 한다.
위험물을 통제하는 이유도 있지만 중량을 줄이자는 뜻도 있을 것 같다.
뒤쪽에서 촬영하니 똑바로 선 건물처럼 보인다. 우편은 대성당의 주보랑 부분
중무장의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가운데 사탑에 입장하기위해 줄을 섰다.
1시간에 30명만 40명씩 입장할 수 있다.
정면의 건물들은 성당 경내에서 영업하는 상점들. 광장 한편이 시가지와 뚤려 있다.
사탑 입구.
피사의 사탑
54.5m 높이의 기울어진 종탑
갈릴레오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 한다.
1174년에 착공하여 높이10m쯤 공사 진행중 지반이 내려앉아 건물이 기울어 지자
감독 피사노가 공사를 중지했고 약 200년간 3차례의 공사로 14세기 후반에 완성.
그후 여러 차례 기울어짐에 대한 보강 공사 후 지금은 완공 상태이다.
1층 공간 벽에 새겨진 보수공사개요-. 5.5˚의 기울어짐을 5˚로 줄였다고 적혀 있다.(상단의 거리로는 46cm)
중앙은 빈 공간이고
계단이 외벽을 감고 돌아 올라간다.
투명 유리로 된 중앙에 하단 바닥이 보인다.
가만히 서 있기가 불편할 정도로 위 쪽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종탑 꼭대기에 그리스형 십자가가 새겨진 옛 피사공화국 깃발이 나부낀다.
피사 공화국
피사 공화국(Repubblica di Pisa)은 10, 11세기 동안 토스카나 지역의 피사를 중심,
사실적(De facto) 독립 국가였다.
제노바에 병합되기 전까지, 11세기 이탈리아의 핵심 4개 해상무역 공화국의 하나
1005년 남쪽의 레조디칼라브리아를 약탈해 영향력을 넓힌 한편 제노바와 동맹하여
사라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1016년 사르데냐를 점령하여 티레니아 해를 장악한 후 제노바와 적대 했다.
1030-1035년 피사는 시칠리아 토후국 도시들을 공격하고 카르타고를 정복.
1051년–1052년에 제독 야코포 치우리니는 코르시카를 정복하며,
제노바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1060년 피사는 제노바와 싸워 제노바의 지중해 해상권을 흡수하였다.
1077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피사가 제정한 “해양의 법과 관세들”을 인정하고,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대표 선출의 권한을 부여해 주었다.
1088년 지리다 왕조의 도시 마디아를 약탈 .
1092년 피사와 제노바 함대는카스티야를 도와 발렌시아에서 엘 시드와 대항했다.
1092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피사에 코르시카와 사르데냐에 대한 지배권을 주었고
피사의 주교구는 큰 도시의 대주교구로 승격됐다
1099년 대주교 다고베르트(미래의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가 이끄는
120척의 피사 함대가 예루살렘 공성전에 참여.
제1차 십자군 원정길에 성지로 향하던 중에 비잔티움의 영토를 약탈.
십자군 전쟁으로 피사와 해상공화국들은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등 해안에 무역항과 식민지들을 건설.
피사가 확보한 식민지; 안디옥, 아크레, 욥바, 트리폴리, 티레, 라오디게아,
예루살렘, 가이샤라,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폴리스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는
피사인에 특별 계류소와 면세등 무역 특권을 부여하고,
계류지가 공격을 받을 시에 이들의 방어를 기대했다.
12세기 초까지 피사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능가하는 무역국이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강력한 동맹이였다.(위키백과)
피사(Pisa:삐사)
토스카나 주의 도시. 피사 시의 시청 소재지이며, 시의 인구는 약 9만명.
문예의 중심지로 번창했으나,1284년 제노바와의 전쟁 후 피폐.
종탑에서 바라본 피사 시가지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고향이며 이 곳 대학에서 공부했다.
갈릴레이와 함께 피사의 사탑으로 UNESCO 선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사탑위의 종
피사의 사탑(=기울어진 탑)은 사실 바로 이 종을 보관해 두기위해 세운 종탑이었다.
사탑 주변에서는 꼭 이렇게 탑을 받치는 포즈의 사진 찍기가 이뤄진다.
사진 촬영후 일행중 한명이 깜짝 놀란다.
주머니에 패스포트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문득, 조금전 사진찍기를 도와주던 외국인이 생각났다.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첫 멧시지가 소매치기 조심이었다.
아! 그 친절했던 사람이 소매치기였구나! 일행 모두는 생각했었다.
"잠깐! 아까 가방 맞겨 두었던 곳을 한번 찾아가보자"
분실한 분이 재촉하여 물품 보간소로 달렸다.
부랴사랴 다녀온 그 분 손에는 유난히 빛나는 패스포트가 있었다!!!
종 탑과 대성당을 뒤로하고 먼 곳에 주차해 둔 버스를 향해 천만다행의 마음으로 성당 경내를 빠져 나왔다.
성당 담장을 돌아 기념품 가게가 늘어선 골목으로 한 200여m 걸어왔을 때다.
한 젊은 여성이 나에게 전단지를 들고 다가왔다.
얼핏 보니 아동들을 위한 무슨 모금 아니면 캠페인을 하고 있는것 같았다.
나에게 바싹 붙어 돕지않겠느냐는 듯 말로 손짓으로 강요한다.
나는 일행과의 시간 관계와 평소 돕고 있는 자선 혹은 구호단체가 몇있어
웃는 얼굴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냥 지나쳐 갔다.
우리는 너무 과한 자선 모금 운동등을 얘기 나누며 10여 m쯤을 더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내 앞으로 와 전단지를 들이 밀며 나와 바싹 몸이 가까워졌다.
순간 그녀가 내 몸에서 떨어 지며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소리쳤다. "passport!!
주위 5m 반경의 우리팀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소리를 지른다.
"오""우와!!!!"
내 앞에는 이틀 전 내가 오르비에또의 골목에서 샀던 작은 지갑이 땅에 닿고 있었다.
나는 분명 보았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지갑"이 아닌 "떨어지고 있는 지갑"을---
돌이켜보니 그녀는 소매치기 중 천사였다!
방어가 허술한 옷매무새인 나에게 경고를 전하려 했던지--- 아니면,
처음 접근했을 때 이미 지갑을 손에 넣었으나 신분증과 card등만 있는걸 확인하자
여행자를 근심시키지 않을 요량으로 다시 지갑을 넣어주러 재차 왔든지----
어찌됐든 너무나도 고마웠다.
마음 속에 탑에서 들었던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진다.
다시 버스에 몸을 실어 "친퀘테레"를 가기위해 La Spezia를 향해 달린다.
멀리 산위 마을 하늘을 감싼 먹구름은 금방이라도 비바람을 쏟아 부을듯하다.
La Spezia-
이탈리아의 대표적 군사 도시답게 해군기지가 시가지 복판에 자리했다.
버스가 시내에 진입할 수 없어 열차역까지 걸어서 갔다.
신호등이 길 복판 공간이 아닌 인도쪽에 있다.
플라타너스(Platanus) 가로수 길.
협죽도( 유도화)도 가로수?로 쓰고 있다
중국 청나라 때 황실의 비 빈들이 임신중절 효과가 있는 협죽도로
경쟁 상대방의 임신을 막았다는 고사가 있는 독성을 가진 협죽도를---
오렌지등 갖가지 나무들이 가로수로 심어진 공원같은 길을 지나-,
스페치아 열차역에 도착.
역앞 광장 풍경
전쟁터 같은 친퀘테레 행 열차
친퀘테레(Cinque Terre)
리구리아 지역에 위치하며, 리비에라에 있는 절벽과 바위로 이루어진 해안.
14세기, 고립생활로 빈곤하게 살던 주민들이
Genoa와 La Spezia간 철도 건설과 정부의 무기고 건설로 외지와 연결되게 되었다.
친퀘 테레로 통하는 베르나차로 이어지는 도로는
2012년 6월 개방되었으나 대부분이 매우 좁아,
우리처럼 마을에서 반마일 떨어진 라 스페치아(La Spezia)에 주차를 해놓고
기차를 타고 마을로 가는 편이 좋다.
1998년 이탈리아 환경부는 친퀘테레(Cinque Terre)를 해양보호지역으로.
1999년에는 친퀘 테레 국립공원으로 지정했고,
2011년 10월에는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해 마을 건물들이 손상되기도 했다
이런 절벽에 둘러 쌓여 마을들이 감춰져 있었다.
열차 출발 5분후 터널을 통과하고, 터널 통과후 또 곧장 나타난 리오 마지오레 정거장을 그냥 지나서 --
마나롤라역에서 내렸다.
지하터널을 걸어서
드디어 마을 초입에 들어 섰다.
그리고 몇발짝 지나서 전개되는 바닷가 풍경!
지중해와 연한 리구리아해의 푸른 물빛이 오랫만의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저 건너편에 모나코,니스등 프랑스의 남부해안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고
나폴레옹이 갇혀 있었던 엘바섬이 가깝다.
절벽에 있는 유료화장실!!-,그런데 사람도 없고 동전을 바닥에 둘 수는 없어 무료로 쓰고 나왔다.
마을의 역사를 짐작케하는 납골당
아마도 평지가 드물어 납골당을 생각했을것 같다.
마나롤라(Manarola)마을- 어촌-, 절벽을 따라 늘어선 집들
이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주민들은 대부분 고기잡이로 생업을 유지 했는데
바다에서 자신의 집을 쉽게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색으로 알록달록한 모습을 칠해 놓았다.
마을 절벽을 따라 포도를 많이 재배해 와인박물관도 있다.(샤케트라 박물관)
다시 터널을 통과하여 이젠 리오 마조레 마을로 간다.
터널벽에 붙여진 열차 홍보물
친퀘(Cinque=5)라 하지않고 5 Terre라 썼다.
다섯 마을이란, 라 스페치아에 가까운 쪽 부터-,
리오 마조레(Riomaggiore),마나롤라(Manarola),
코르닐리아(Corniglia),베르나차(Vernazza),
몬테로소 알 마레(Monterosso al Mare) 등.
터널에 전시된 산 위쪽 마을을 촬영한 사진-. (하단 중앙에 터널 일부가 보인다.)
마나놀라 역 플랫폼(platform).-역과 이어진 터널이 이채롭다.-지나온 마을을 향한 북방향
라 스페치아를 향한 남쪽 방향
이 쪽도 역시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 한마디로 양방향이 터널인 기차역
리구리아해의 잔잔한 물결이 왠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다시 열차를 타고 리오 마조레 마을에 도착했다
리오마죠레(Riomaggiore)마을- 마이오레강변, “피날레 광장“, ”체리코 언덕”,”바티스타 성당“등이 있다.
마을 뒤쪽 언덕에서 해안절벽과 포도밭, 마을 해변을 볼 수 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도록 차단기를 세워뒀다.
피날레 광장
왼쪽,바티스타 성당
리오마죠레와 마나롤라를 잇는 산책길-, "사랑의 샛길(Via dell’Amore)'
리오 마조레역이 아래에 보인다.
방향을 바꿔
산비탈에 거미줄처럼 뚫어진 작은 골목길을 따라
다시 열차역을 향해 돌아왔다.
좁은 지형상 수도관과 배전선이 벽에 노출된채 시공되어 있다.
미로같은 골목을 한참을 걸었다.
다시 돌아온 리오 마조레역-,다시 라 스페치아로 돌아가기위해 열차를 기다린다
라 스페치아 역에 도착하여
다시 오렌지가 열린 가로수 길을 지나고
해군기지 근처의 주차장까지 걸은후
버스로 3시간을 달려
여행 마지막 날 머물렀던 밀라노의 홀리데이 인 밀란 아사고 (Holiday In Milano Assago)-.호텔에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