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의 역사
바티칸 언덕(Mons Vaticanus)은
로마인들이 로마 신화의 키벨레와 그 배우자 아티스를 숭배하던 곳이었으며,
점을 치는 언덕(ager vaticanus)이라 하여 통행을 금지하여 신성하게 여겨왔다.
BC 14년부터 AD 33년 사이, 아그리피나는 바티칸 언덕과 그 주변에 물을 대고
그 자리에 자신의 개인 정원을 설치하였다.
37년 칼리굴라는 이곳에 원형경기장 (현,베드로광장)을 만들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오벨리스크를 옮겨 왔다.
64년, 네로 때의 대화재 이후 바티칸 언덕은 그리스도인의 순교 장소로
성 베드로도 원형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원형경기장 맞은편에는 비아 코르넬리아를 경계로
로마 시대 이교도의 제단과 비문 등이 있는 공동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유물들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자주 발견 되어,
교황 비오 12세 때 대규모적인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325년 성좌는 니케아 공의회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으며,
326년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최초의 성당인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졌고,
5세기 초 대성당 근처에 교황의 궁전이 지어지면서 이 지역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
756년 랑고바르드 왕국(1870년 까지)을 세운 피핀 왕이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넓은 영지를 교황에게 기증하여
약 천년 동안 로마와 주변을 장악해 교황령이란 이름 아래 다스렸다.
이 시기 교황들의 거주지는 라테라노 궁전, 근세에는 퀴리날레 궁전.
(1309년-1377년 아비뇽 유수기는 제외)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스위스 청년 가톨릭 신자 중에서 150여명을 뽑아 근위대를 창설했다.
19세기 중엽 민족주의자들이 득세, 교황청은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1861년부터 1929년까지 교황의 소유지를 인정치 않는 “로마 문제”상태.
1870년 로마가 이탈리아에 강제합병,
바티칸 지역은 로마의 보르고 지구의 일부분으로 되었다.
천년 동안 이어지던 교황령은 끝나고 교황등 교직자들은 바티칸으로 피신.
교황들은 로마 및 기타 지역을 이탈리아에 귀속시키라는
이탈리아 정부의 주장을 거부.
교황령이 이탈리아에 병합된 후에도
다른 나라들은 교황청의 독립적인 국가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다.
이탈리아는 바티칸에 대해 무력 행사는 않았지만
퀴리날레 궁전을 포함하여 교회 재산의 상당수를 몰수했다.
교황령의 마지막 통치자인 교황 비오 9세는 로마를 잃은 이후
스스로를 바티칸의 포로’라고 표현했다.
레오 4세가 테베레 강 서쪽 연안에 성벽을 쌓아 올린 때부터
로마로부터 자연스럽게 분할되었으며,
이후 레오 4세의 벽을 포함하여 바오로 3세, 비오 4세,
우르바노 8세가 쌓아올린 성채로 면적이 더 확장되었다.
1929년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간 라테라노 조약 체결
라테라노 조약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교황 비오11세로부터 전권을 이양받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에 의해 조인되었다.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였으며
가톨릭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삼았다.
바티칸 또한 로마를 수도로 한 이탈리아 정부를 정식으로 인정,
바티칸의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국경에는 벽과 선을 그었다.
베드로 광장은 광장 밖 비오 12세 광장을 경계선으로 본다.
이탈리아는 교황청 소속 건물에 치외 법권을 부여했으며,
조약 기념으로 무솔리니는 광장에서 테베레 강까지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 (화해의 길)를 건설했다.
파시즘 정권이 물러나고-
1947년 이탈리아 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도 라테라노 조약은 그대로 유지 되었다.
1952년 장관 업무인 시국 관리를 주교회의 의장이 수행,
1963년 우리나라와 외교 관계 수립.
1984년 가톨릭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않는다는 정교 협약을 맺었고,
바티칸 시국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2001년 주교회의 의장의 공식 칭호를 바티칸 시국의 장관 겸 행정처장으로.
2007년 탄소 방출에 중립적 입장을 최초로 밝힌 국가,
탄소 배출 상쇄 목표를 달성하고자
헝가리에 바티칸 기후 산림을 조성하고 있다.
2013년 현재 프란치스코가 교황이고,
주교회의 의장은 교황이 지명한 이탈리아 대주교 주세페 베르텔로이다.
보이는 줄이 다가 아니다.
한바퀴 쯤 도는 줄과 입구에 예약자가 서는 줄이 따로 길다.
예약해도 자칫하면 오랜시간 줄을 서 있어야 한단다.
테베레강을 가르는 마테오티 다리(Ponte Matteotti)를 지나
동쪽 고대 로마 유적 시가지에서 서쪽 바티칸 쪽으로 건너 왔다
바티칸(VATICAN) 시국
‘바티칸’은 라틴어 ‘Mons Vaticanus’에서 유래. -바티칸 언덕이라는 뜻
면적; 500m x 900m, 인구; 약 900명(2008년) 정도.
3천 명의 이탈리아 평신도가 봉사한다.
봉헌금과 우표, 기념품 판매, 미술관 입장 수수료 출판물 판매 등으로 재정을 충당.
가장 큰 봉헌금은 베드로 성금.
유로화와 바티칸 동전을 사용한다. 바티칸 유로 동전은 희소성이 있어 수집 대상.
입법 및 일상 언어는 이탈리아어지만 교회의 공식 문서에는 라틴어가 사용된다.
스위스 근위대의 언어는 독일어, 충성 서약은 각자의 언어로 한다.
인가를 받아 시민권을 받을 수 있고, 기간만료되면 시민권이 해제.
인가기간에는 배우자와 자녀들도 시민권이 부여된다.
시민권 만료 후 타국적이 없는 자는 이탈리아 시민권을 갖게 된다.
시민권은 반드시 신앙을 갖지 않아도 얻을 수 있다.
교황의 공식 직함은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다.
교황직은 선거제로, 콘클라베에서 여든 살 이하의 추기경들이 선출한다.
교황은 유럽 현존의 유일한 절대 군주이며,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을 쥐고 있다.
현재 교황은 유럽에 남은 유일한 절대 군주이다.
입법기능은 교황이 5년마다 임명하는 7명의 추기경들로 구성된 주교회의가,
행정기능은 바티칸 시국 행정처에 위임하고 있다.
행정처는 바티칸 시국 주교회의 의장, 국무원장, 국무부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자 5년마다 교황에 의해 임명된다.
행정처 활동은 주교회의와 국무원을 통해 교황의 확인을 받는다.
대외관계는 국무원과 외교관들이 맡고 외국의 대사관 들은 바티칸 밖에 주재한다.
교황 공석 기간 중에는 궁무처장과 추기경이 교황을 대리하여 국가원수 역할을 담당.
국제 관계에서는 성좌(聖座, Sancta Sedes)로 호칭되고,
재외 대사도 시국이 아닌 성좌에서 파견한다.
성좌와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나라는 177개국.
미수교국은 북한, 중국,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등.
성좌라는 표현은 교황의 영적 통치권을 뜻하는 것으로, 교황청에서 사용한다.
영토는 성좌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성좌는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독립적 주권을 가진 실체로 인정받는다.
국경의 경비는 이탈리아에서 담당하고,
성좌 소속인 국가헌병대가 바티칸 시국의 경찰력을 담당한다.
일반시설은 바티칸 시국 소속 경찰들이,
베드로 광장은 바티칸과 이탈리아 양국이 공동으로 치안을 유지한다.
시국의 공무원들은 대부분 성직자나 수도자로 이루어져 있다.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 사도 궁전에서 집무를 수행한다.
바티칸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베드로 대성전과 시스티나 성당 등에는
산드로 보티첼리, 베르니니,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이 가득하고
박물관과 문서관에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소장품을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다.
바티칸 미술관(Musei Vaticani)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인근 포도밭에서
트로이 사람들에게 그리스군의 목마를 도시에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던
신전의 성직자 라오콘을 묘사한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발견물을 조사하고자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파견.
그들의 추천으로 교황은 포도밭 주인에게서 그 조각상을 구매하고
바티칸에 진열하여 대중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이 바티칸 미술관의 시작이 되었다.
1773년 (교황클레멘스 14세) 일반에 본격적으로 공개되기 시작하여
2006년 개관 500주년 기념으로 바티칸 언덕을 대중에 영구히 개방하였다.
2015년 한 해만 600만 명이 방문. 하루 16,000명 꼴.
입장할 수 있는 전자 카드
출입구도 새롭게 개축하여 신 공법이 적용된 흔적이 보인다.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 길도 있다.
벨베데레 안마당(Cortile del Belvedere)-솔방울 정원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인, "최후의 심판"을 소개하는 그림판
현장에서의 설명이 어려워 각국의 여행사 가이드분들이
솔방울 정원 한편에 있는 이 곳 그림판을 점령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인다.
지도 전시실: 벨베데레 뜰 서쪽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의 지시로
탁발수사인 페루자의 이냐치오 단티가 그린
120m의 이탈리아 전역의 지형도와 40개의 패널화가 있다.
보티첼리의 프레스코화; 코라의 형벌- 모세에 반발하여 코라에 설득된
이스라엘의 반란과 하나님의 징계를 묘사한 창세기의 이야기.
시험산의 그리스도;식스토 4세를 위해 그린 프레스코화, 신약성서 내용,
바티칸 회화관 ; 교황 비오 11세가
보르자 아파트에 보관된 역대 교황들의 소장품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설.
카라바조의 “거룩한 매장”(1602-160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 예로니모의 초상화. 프라 안젤리코,
조토 디 본도네, 라파엘로, 니콜라 푸생, 티치아노 베첼리 등의 작품.
현대 종교 미술 전시관; 카를로 카라와 조르조 데 키리코등의
그림과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1800년대 초에 이곳을 세운 교황 비오 7세가
교황이 되기 전 성씨 키아라몬티에서 유래하여 붙여진 것.
미술관의 측면은 조각상과 석관들이 진열된 아치형 전시실로 구성.
라파엘 스턴이 세운 새 윙 브라치오 누오보에는
아우구스투스 조각상, 나일 강 같은 조각상들이 진열되어 있다.
마옥속 전시실의 3,000개가 넘는 세계 최대 종류의 비석.
연구 목적과 특별 허가 없이는 관람이 불가하다.
비오-클레멘스 미술관;1771년에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건립,
고대 그리스·로마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을 소장하는 곳이었다.
미술관과 전시실은 클레멘스 14세의 후임자 교황 비오 6세에 의해 확장
비오-클레멘스 미술관은 시스티나 성당과 총 54곳의 전시관으로 구성,
시스티나 성당은 미술관 끝에 있어 전시관들을 모두 둘러보아야 도달.
주목할 만한 전시관들은 아래와 같다.
*그리스 십자형 전시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모후, 딸 콘스탄차의 석관이 전시.
*원형 전시실: 몇몇 모자이크와 상(像)이 전시되어 있다.
*조각상 전시실: 비문과 조각상-붉은 대리석의 교황좌 (산 조반니성당서 이송)
초기 성도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 교리상 의 석관, 비문 등.
잠자는 아리아드네와 메안드루스 등의 조각상들과
바르베리니 칸델라브룸이 있다.
*흉상 전시실: 흉상 몇 개가 전시되어 있다.
*가면 진열실: 바닥의 가면모자이크에서 유래. 벽에 삼미 신조각이 유명.
*뮤즈 전시실: 아폴로 신과 아홉 명의 뮤즈 여신상 조각.
*동물 전시실: 동물 조각상이 전시.
*라파엘로의 방- 라파엘로와 .“아테네 학당”으로 대표되는 그 제자들의 작품
우측후방 니콜리나 예배당
벨베데레의 안뜰을 사방으로
조각 미술관들을 포함한 미술관들이 둘러 쌓여 있다.
이집트 미술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세운 이 미술관은 고대 이집트 유물들-,
파피루스와 그라시 전시관, 동물 미라, 사자의 서와 같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에트루리아 미술관
1836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세운 미술관,
에트루리아인들의 작품들을 소장한 여덟 곳의 전시관 집합체이다.
항아리, 석관, 청동제 미술품 등을 비롯한 유물들과 굴리엘미 전시관이 있다
미술관과 통하는 경로에 시스티나 성당과 라파엘로의 서명의 방이 있다.
*시스티나성당(Aedicula Sixtina)
교황의 관저인 사도 궁전에 있는 성당이다.
1362년 교황 식스토 4세때 교황 묘로 쓰기위해 솔로몬의 성전을 모델로 건축.
(41mX14m로 솔로몬 성전과 크기가 같다)
처음 마조레 (Cappella Maggiore) 성당으로 이름 한 이 건물이
조반니노 데 돌치의 감독 아래
1473년에서 1483년에 걸쳐 재건축되어
교황 식스토의 이름을 따 시스티나로 개명하였다. 바치오 폰델리가 설계.
외관에 출입구가 없어 교황궁의 내실을 통해 출입하며,
외관 전체모습은 교황 궁의 채광창이나 근처 창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1482년, 성당 내부 양쪽 벽을 보티첼리와 페르지노가
모세와 그리스도의 생애를 새긴 프레스코화로 장식했고
1483년 식스토 4세에 의해 축성하였다.
나머지 벽과 천정을 미켈란젤로가 율리우스 2세 때 완성.
1455년 식스토 4세 이후, 시스티나 성당은
종교적 행사와,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콘클라베;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하는 의식.
새 교황이 선출되었을 경우, 투표용지들을 태워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고,
후보자가 2/3를 득표하지 못하면 첨가물을 넣어 검은 연기를 피워
아직 투표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린다
천지창조,
1504년 푸른 하늘에 금빛으로 빛나는 별들이 그려 진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균열.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천장을 새로 칠하게 하였다.
수년간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상등 조각에 몰두하였던 미켈란젤로는
정적들의 음모라고 의심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의 부탁을 처음에는 사양했었다고 한다.
*천지창조의 내용과 노아시대 홍수 등
창세기의 내용 12,000점의 인간그림이 모두 나체였으나
교황 비오 4세때 다니엘라 다 본테라가 수정하여 가렸고
(이후“기저귀 화가”란 별명을 얻었다) 최근 보수 때 원래대로 복원됐다.
최후의 심판,
1536년, 미켈란젤로는 이번에는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벽화 장식을 의뢰받았다.
그는 페루지노와 다른 화가들의 작품 세 점,
자신의 24년전 작품 두점의 루네트화를 없애고
그 자리에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을 그려 넣었다.
1541년,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은 최후의 심판이 완성됐다.
-중앙은, 심판자 예수-마리아와 성인들
-왼쪽은, 모세의 일생. 오른쪽, 예수의 일생
오른쪽, 지옥으로 가는 죄인들.
예수의 발아래 바돌로메는 비통한 자화상으로 해석.
※ 태피스트리(tapestry); 색실로 무늬를 짜넣은 직물.
※ 프레스코화; 물감에 물과 석회와 모래를 섞어 그리는 작품.
※ 루네트(Lunette); 둥근 천정과 밑 벽 사이의 반달 모양의 공간.
1527년 라파엘로의 테피스트리 들이
독일 용병들에 태워지거나 약탈당하여 유럽 전역에 흩어지고 말았다.
태피스트리들에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생애가 묘사되어 있었다.
1983년 태피스트리를 다시 모아 짜 맞추어 씨스티나 성당 벽에 다시 전시.
산 피에트로 대성당(Basilica Sancti Petri).
서기 67년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려 순교한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운 성당
1506년 르네상스부터 건축이 시작되어(브라만테)
1626년 바로크 시대(베르니니)까지 120년을 걸쳐 완공,
종교개혁의 단초가 되었다.
예수께서 원래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16:18-19) 고
말씀하시고 “천국의 열쇠를 주노라” 하셨다.
326년에서 333년 사이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묘소를 방문하려고 찾아온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목적으로
베드로가 묻힌 곳이라고 추정되는 곳에
라틴 십자가 양식으로 옛 베드로 성당을 세웠다.
1447년 (아비농 유수기)교황 니콜라오 5세는 옛 성당의 노후화가 극심해지자
알베르티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에게 성당 보수를 지시하고,
로셀리노에게 설계도를 의뢰하며
건축에 필요한 돌 2,522개를 콜로세움에서 가져와 대기 시켰는데
갑자기 선종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경고라는 우려속에 뒤를 이은 교황 율리오 2세는 공사를 강행,
설계 후보 중 그리스 십자가 형태를 인용한 브라만테의 설계안을 선정
1506년 공사를 시작했다. -설계 출품작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
공사는 레오 10세를 거쳐 인노첸시오 10세 때까지 120년 동안 계속.
브라만테 감독을 시작으로,
줄리아노 다 상갈로-프라 조콘도감독-라파엘로에 이르렀으며,
1520년 라파엘로가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죽자 그의 뒤를 페루치감독 그리고-,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 감독이
브라만테,라파엘로, 페루치의 특징을 합친 설계도를 수정하여 인용했다.
1592년 (231대 교황 클레멘스 8세) 대성당 안에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의 양팔 부분 두 개의 납 용기에,
한쪽에는 성십자가의 파편과 성 안드레의 유골을,
다른 한쪽에는 거룩한 양의 원형 초상화를 담았다.
1602년 도메니코 폰타나의 조카 카를로 마데르노가 책임자로 이어받았고
1606년 (교황 실베스테르 1세) 콘스탄티노 옛 성당의 남은 건물
박공벽 꼭대기의 콘스탄티누스상을 내리고, 대리석 십자가를 놓았다.
1607년 후임 열 명의 건축가는 미켈란젤로의 생각인 중랑을 확장하기로 결정.
1614년 아치 천장에 치장 벽토를 발랐다.
1615년 가운데 벽을 허물었고 중랑을 종려주일에 맞추어 개장하였다.
성경에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베드로의 무덤이
이곳 발다키노와 제대 아래에 있다고 생각해서,
베드로를 시작으로 많은 교황이 이곳 베드로 성당에 묻히게 되었다.
마데르노는 콘페시오를 설계하여 베드로의 무덤 등
백기가 넘는 무덤들이 있는 대성당 밑 지하를 연결했다.
(추기경이나 허가 받은 사람만이 갈 수 있다.)
1626년 (교황 우르바노 8세) 대성당 건축의 마지막 감독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마데르노의 후임자로 50년 동안 작업.
그는 미사를 집전하는 제대 위의 발다키노를 3.7t의 청동을 사용 완성했다.
1666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 베드로가 앉았던
나무 의자(Cathedra Petri) 조각들을 맞춰
상아장식을 입혀 제대 뒤쪽에 안치했고 무게 7.5t의 청동을 입혔다 한다.
1676년 성체 경당 장식을 마지막으로, 베르니니는1680년 82세에 사망했다.
*(발다키노,Baldacchino;
원래 값비싼 견직물, 금란(金襴)을 지칭했으나
나중 옥좌(玉座) ·제단 ·묘비 등의 덮개인 천개(天蓋)를 뜻하게 되었다.
대리석 ·목재 ·금속 등의 4개의 기둥으로 받쳐진다.
라벤나나 로마의 바실리카에서 처음 시작했으며,
베드로 성당의 천개는 르네상스 시대 발다키노의 유행을 촉진시켰다
제대 위의 경당에는 예수님의 땀을 닦았다는 수건, 못 박혔다는 십자가 조각,
허리를 찔렀다고 전해지는 창 등의 성유물들이 소장되어 있어
사순절 마지막 성주간에만 특별 공개를 허가하고 있다.
1547년 (바오로 3세) 70대의 미켈란젤로가 상갈로의 뒤를 이어
대성당의 건설 감독을 물려 받았다.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차선책으로 선택했었기에
성당 천장과 벽화에 이은 차선책에 미켈란젤로는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사도 베드로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로 수락했다.
그는 여러 설계를 참고하여 돔은 판테온 신전을 본뜨고,
그리스 십자가와 라틴십자가 형태의 대칭평면을 표현했다.
돔은 137m로 세계에서 가장 높고 지름은 소피아 성당보다 약 9m 정도 크다.
미켈란젤로는 돔 아래의 원통형 부분을 완성한 채 1564년 세상을 떠났으며,
비오 5세는 미켈란젤로 조수 자코모 다 비뇰라와 조르조 바사리가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이어가도록 했다.
1585년 (교황 식스토 5세) 자코모 델라 포르타 감독이 그 뒤를 이었으며
1590년에 대성당의 중앙 돔을 완공하였다.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 내부는 500개의 기둥과
400개가 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따로 분리된 44개의 제대와 10개의 돔이 있으며,
1300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
성 베드로 광장(Piazza di San Pietro)
폭 246m. 광장 입구에서 대성당의 입구까지 300m.
베르니니의 설계로 1656년 부터 건설.
네로의 개인 경기장이 있던 이 경기장에서 베드로는 순교했다,
네로의 경기장은 모두 철거했지만, 오벨리스크만은 왼쪽에 있었던 것을,
교황 식스토5세 때 현 위치로 옮겼다.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5m, 약 300t의 무게를 옮기려고 900여 명이 동원됐고
말이140여필 47대의 권선기가 제작되었다.
옮겨진 오벨리스크 위에 청동으로 십자가를 올려놓았는데, 이 십자가 안에는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예수님의 십자가 원목 일부가 들어 있다.
정면을 볼 때 왼쪽 분수대-, 도메니코 폰타나의 작품.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성전에 들어가기 전 몸을 씻는다는 의미의
바로크 문양의 두 개의 분수대가 있다.
대회랑에는 양편으로 16m높이의 대리석 원기둥이 네 줄로 284개 서 있다.
회랑에서 내부로 갈 수 있는 다섯 문 중
성년의 문은 50년 주기로 1년 동안 열리고 교황만이 이 문을 열 수 있다.
지금의 문은 1950년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비코 콘소르티가 설계한 것.
광장 끝은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가 산탄젤로와 직선으로 길게 이어진다.
1929년에 바티칸과 이탈리아가 체결한 라테라노 조약을 기념하고자
1937년 착공하여 1950년에 개통된 이 길은 “화해의 길”이라는 뜻.
대성당의 외관은 마데르노의 설계에 따라 1607년부터 1614년에 완공했다.
외관 윗부분 중앙에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와 좌우에 열한 제자 상이 있다.
외관에는 중앙 난간을 포함해 모두 세 개의 테라스가 있다.
중앙 난간에서는 교황 선거에서 새로 선출된 새 교황이
군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 연설하고,
성탄절과 부활절 정오에
전 세계에 보내는 축하 메시지를 낭독한다. (우르비 라고 함)
양측 꼭대기 두 개의 시계종탑은 1288년대에 제작하였는데
왼쪽 시계는 1931년 부터 전기로 작동하고 있다.
중앙 입구 모자이크 “나비첼라”는 조토의 설계로 교회를 상징하는 배를 표현.
외관 뒤로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데르노의 열주 현관 또는 “나르텍스”가 있다.
1950년 12월23일, 교황 비오 12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성 베드로의 무덤을 발굴 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9세기 이후 접근 금지 상태였던 대성당 지하실을 조사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발굴 장소는 1세기 때 교황
아나클레토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에 가까운 지하 공간이었다.
2007년 미켈란젤로가 붉은색으로 그린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단면도가 바티칸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
※ 로마의 4대 성당
산 피에트로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산 파올로 데 라무라성당
현재 로마 교구의 대성당은 베드로 성당이 아닌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Victoria Terme Hotel----Roma근교 티볼리-, 이곳에서 3일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