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와서 처음으로 햇빛이 비친다.
사실 도착한 날부터 줄곳 우리 주변엔 먹구름과 비가 맴돌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가는 여행지에는 비가 오지 않았었다.햇빛까지 비춘다는 건!
왠지 횡재한 기분이다.
예쁘게 전정된 소나무 아래로 축복처럼 햇살이 비친다-
우측은 콜로세움 옆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o di Costantino)
312년, 콘스탄티누스군의 로마 진군 때,
십자가의 환상을 보고 승리한 당시의 전투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이 사건은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한 것과 로마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1세 즉위 10년에 티투스 개선문을 참고로 원로원이 세운것.
풍선지점은 팔라티노 언덕-
포로로마노,콜로세움등의 유적이 주변에 있다.
로마(Rome).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라치오 주의 주도로, 테베레 강 연안에 있다.
면적은 서울시의 2배정도이고, 2014년 인구는 290여만명. 권역은 430여만명.
특별 코무네 지역이며, 이탈리아 전 코무네 8,101개 중 제일 큰 코무네이다.
코무네 행정청은 카피톨리노 언덕의 세나토리오 궁전에 있는데,
지방 정부를 이 언덕의 이탈리아어인 '캄피돌리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은 고온건조, 겨울은 따뜻하다.
유적으로는, 도무스 아우레아, 아우구스투스 영묘, 카라칼라 욕장, 콜로세움,
포로 로마노, 판테온 등이 있으며, 옛 석조물은 대부분 테베레 강 동쪽에 있다.
라테라노 궁전과, 미술관으로 카피톨리니 미술관, 산탄젤로 성 등.
로마 가도는-아우렐리아 가도, 카시아 가도, 폴라미니아 가도, 아피아 가도 등.
유명 성당으로는 산 조반니 인 라테나오 대성당, 산타 마리아 모조레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성당 등.
1934년과 1990년 월드컵 결승전을 개최. 1960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다.
로마의 역사
B.C 8-9세기경, 북방 이주민이 테베레 강 하구에 정착한 것이 로마 형성의 시초.
초기 로마는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사비니인으로 구성됐었다.
B.C 8세기 철기 시대 유적이 팔라티노 언덕에서 발견된다.
B.C 753년경 고대 그리스 전쟁의 신 마르스의 쌍둥이 아들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세웠다.
로물루스는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자기 이름을 따서 도시를 로마라 함
로물루스 이후 244년 동안 왕 7명이 통치한 왕정체제였고
B.C.509년 마지막 왕이 폐위되자 이후 450여년간 공화정(republic)체제로 운영.
*(공화제(republic)는 '공공의 것'을 뜻하는
라틴어의 레스 푸블리카 (res publica)에서 나왔다.
B.C 264년에 시작해서 120년 만에 끝난 포에니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B.C212년-B.C168년)으로 지중해를 장악.
이후부터는 제정(독재)로마시대가 전개되었으며
B.C 88년 부터 8년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사이에 내전이 발발했고,
B.C73년 스파르타쿠스 반란 후,
B.C59년 부터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정치가 시작됐다.
B.C58년-B.C51년 카이사르는 갈리아(*현 프랑스) 전쟁을 종식 시킨후
B.C49년-B.C45년 폼페이우스와의 내전 승리로 권력을 쟁취하게 됐으나,
B.C44년 공화정 지지파인 브루투스 등에 암살당하고
B.C43-33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에 의한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
B.C31년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을 통해 로마 유일의 권력자로 부상.
B.C27년 시작된 100여 년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A.D68년 네로 황제의 자살로 막을 내렸다,
A.D69-96년 내전의 승자인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플라비우스 왕조가 열리고,
169년 까지의 100년간 로마제국의 황금기인 5명의 황제가 차례로 통치했던
오현제 시대 또는 팍스로마나 시대(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성립.
98년-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에 로마의 인구는 100여 만 명으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다.
193년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당하고 내전후 세베루스 왕조가 성립.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피살되고.
40여년간 20여명의 황제가 암살되고 바뀌는 혼란의 군부 시대가 계속,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50여년간 사두 정치를 시도하였는데.
메디올라눔 (현 밀라노), 니코메디아, (현 터키),
트리어(현 독일), 시르미움(현 세르비아)의 4수도가 생겼다.
330년 콘스탄티누스1세는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현 이스탄불)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사후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분리.
그리스의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라틴의 서로마제국은 라벤나로 천도, 하자
로마시는 정치적 중요성을 잃게 된다.
410년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함락되어 약탈당하고,
455년 반달족에 의해 로마가 다시 함락되어 약탈당한다.
476년, 게르만 용병 장군 오도아케르에 의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당하고서로마제국은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 왕국, 게르만족 왕국들의 지배를 거쳐
6세기 브터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지배하게 된다.
800년 샤를마뉴는 로마 교황청에 로마의 지배권을 부여,
15세기 중반 이후, 교황령의 수도로써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성벽과 성당 수복 공사등을 실시.
그에 따라 유명한 예술가 등이 로마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5세기 말엽에는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교황을 위해 예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루터교 용병들의 침략을 받는
이른바 로마 약탈 사건이 발생하여 르네상스 시대는 막을 내리고
16세기 말 교황 식스토 때 도시가 근대화 되기 시작,
도로를 건설하고 광장과 샘도 만들어 로마의 모습을 되살려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도 이 때 끝났다.
17세기 건축물에서 종교 개혁 시대의 특징인 바로크양식이 형성됐고,
베르니니등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활약했다.
18세기 전반에는 스페인 계단 등에서 볼 수 있는 로코코 양식이 유행했고
이어서 신고전주의 건물이 유행했다.
1797년 나폴레옹이 로마를 점령,많은 미술품이 약탈당했으나
나폴레옹 1세의 몰락 후 빈 회의에서 로마는 다시 교황령이 되었고,
1871년 세 번째로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1972년 부터 municipi로 시의 행정 분권화를 확대하고
2001년 까지 circoscizioni라는 행정 구역으로 지방을 세분화.
각 무니치피오는 주민이 뽑은 네 명의 의원이 5년씩 행정을 맡는다.
로마의 무니치피오는 처음 20개에서 19개로,
2013년 에는 15개로 축소됐다.
* (로마시는 다른 형태의 비행정 구역으로도 나뉜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내의 중심부를 22개 리오네로 세분.
고대 로마의 각 “지역”이 중세에는 “리오네”로 발전.
르네상스 시대 교황 식스토 5세 때 다시 14개 “지역”으로,
1743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리오네”로 다시 획정.
나폴레옹 점령기에는 새로운 행정 구역이 잠깐 적용됐으며,
1870년 수도로 된 후, 도시화와 인구가 폭증하자
1874년에는 도시화지구였던 몬티 리오네에서
15번째 리오네인 에스퀼리노가 갈라져 나왔으며,
1921년, 교황 우르바노 8세 성벽외곽에 프라티 리오네가 신설되었다.
이후부터는 로마 시의 새로운 행정 구역명으로 quartiere가 사용.
현대의 모든 리오네는 제1무니치피오의 영역에 속해 있다.
2015년, 북쪽 치비타베키아 까지였던 구 로마를 수도 광역시로 하여 행정의 중심지.
광역시의 면적은 5,400제곱미터로 리구리아 주와 같다.
로마는 라치오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다음백과,위키백과,구글 지도 참조)
콜로세움(Colosseum) -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
높이 42.38m, 둘레 530m 등 당시 건축물 중 최대.- 설계자 미상
서기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황제의 궁전 정원 인공 호수를 메우고 착공
10년 뒤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다.
콜로세움(Colosseum) 명칭의 유래는
근처에 있던 네로의 청동상(Colossus)과 명칭이 혼동되었다는 설과
'거대하다'는 뜻의 콜로살(Colossal)과 어원이 같다는 설이 있다.
4층 구조 최대 7만명의 관객을 수용 검투사가 육상 및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 사용되었다.
608년까지 경기장으로 사용, 중세는 군사적으로 이용,
이후에 성당이나 궁전 등의 건축에 사용될 자재의 제공 터가 되었다.
19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일부 복원.
1층은 도리아식 반원주, 2층은 이오니아식 기둥, 3층은 코린트식 기둥이고
4층은 햇빛을 피하게 천막을 칠 수 있는 240여개의 기둥들로 되어 있다.
천막을 치기 위해, 근처 오스티아항구에서 배를 이용해 줄을 끌어 당겼다고 한다.
독립 공간인 갈레리아도 있었는데
이 갈레리아에서 이집트산 콩, 음료수 등을 팔아 시민들이 여기서 휴식했다.
바닥은 모래로, 곳곳에 사냥장처럼 나무와 구릉을 설치.
바닥 아래에는 노예와 맹수들을 수용하던 우리 시설이 있었다.
시내 벤스투어-대형 버스의 골목 진입이 어려워 여행사에서 기획한것 같다.
진실의 문에 들어가기 위해 서 있는 줄
홈이 파진걸로 보아 파괴된 다른건물에서 가져온것이 확실한 기둥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Santa Maria in Cosmedin) 입구에 있는 진실의 입
미켈란젤로 계단을 걸어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에 도착.
이 언덕에 있는 세나토리오 궁전에 로마코무네 행정청이 있다.
카피톨리노 박물관(Musei Capitolini)
Capital이란 어원이 여기서 비롯됐다 한다.
포로 로마노;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 Forum의 어원이 된곳.
중앙-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우측- I Rostri
팔라티노언덕이란
이 주변 콜로세움, 전차경기장,포로로마노등을 포함한 언덕과 광장을 말한다.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293년 까지 로마의 정치와 경제를 통치했던 현장.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하고 수도 기능이 라벤나로 옮겨지면서
이민족에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방치되어 묻혔는데
19세기부터 발굴한 대부분이 제정 시대 이후의 유물이었다.
이 포룸 로마눔은 로마에 개설된 최초의 포룸으로,
원로원, 의사당, 신전 등 공공 시설이 있었다.
원형경기장-
현지에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o Massimo)라 칭한다.
왼편 전정된 소나무 우측 보일듯 말듯한 건물이 로물루스가 살았던 집.
베네치아 광장-, 맨 왼쪽 갈색 건물은 베네치아 궁전(Plazzo di Venezia)
1455년 베네토 피에트로 바르보(Veneto Pietro Barbo) 추기경이 건축.
1564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교황청 대사관때 베네치아 궁전으로 불리기 시작.
무솔리니가 집무했던곳 이 건물 발코니에서 무솔리니는 2차대전 참전을 선포.
판테온의 정면
원형 건물인 판테온은,
주랑 현관에 세 열의 거대한 화강암으로 된 코린트식 기둥들이 있는데,
첫 번째 열에는 여덟 개, 각각 네 기둥이 있는 두 열은 뒤쪽. 위쪽에는 박공벽.
정면에 "M·AGRIPPA L F COS TERTIVM FECIT"
= Marcus Agrippa, Lucii filius, consul tertium fecit
=루시우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 번째 집정관 때 만들었다.”는
문구가 선명하다.
판테온(Pantheon)은 그리스어 ‘판테이온(Πάνθειον)’에서 유래한 말로,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
로마의 돔구조물중 가장 오랜 건축물.
가장 높은 높이와 내부 원의 지름이 43.3m로 같다.
B.C.31년, 집정관 아그리파는 판테온을 기공하고 B.C.27년 완공하여 신에게 봉헌.
A.D.80년 로마의 화재로 아그리파의 판테온은 소실.
125년경에 그리스 문화를 부러워 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신들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통치하고자 재 건축한 것이 현재의 건물.
설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혹은
당시 건축가인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루스가 했을 가능성이 크다.
7세기 이후부터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사용했다.
판테온은 현재 성당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는 건물임에도 보존이 잘되어 있다.
202년 세베루스와 카라칼라 황제가 보수 작업.
609년 동로마 제국 때 교황 보니파시오 4세는
포카스 황제로 부터 판테온을 기증 받고
이 건물을 산타 마리아 아드 마르티레스(Santa Maria ad Martyres)라는
성당으로 개축한 다음 축성(祝聖)하였다.
현재는 산타 마리아 데이 마르티리(Santa Maria dei Martiri).성당으로 개축,
덕분에 중세 초기의 파괴와 약탈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의 기록을 보면 당시의 약탈 현장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663년 7월 로마를 방문한 콘스탄스 2세에 의해 자행된 건물들의 약탈)
0.건물의 외부를 장식하던 양질의 대리석들이 없어졌으며,
0.건물기둥의 머리부분은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7세기 초 교황 우르바노 8세는 현관의 청동 천장을 벗기고
중세풍의 종탑을 카를로 마데르노가 설계한 쌍둥이 탑으로 교체했다.
그 외에 없어진 것은 외부의 조각상들로
아그리파의 명문(銘文) 위의 페디먼트를 장식하던 것이었다.
대리석의 실내 장식과 청동 문은 복원 작업을 통해 보존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판테온은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라파엘로의 무덤
입구에서 왼쪽 세번째 벽감에 있는 라파엘로의 유해-
석관의 비문에 따르면 “뼈와 재들이” 남아있다.
라파엘로 석관의 오른쪽에는 약혼녀인 마리아 비비에나가 묻혀 있다.
석관은 교황 그레고리오 14세가 기증한 것으로,
피에트로 벰보가 새긴 비문에는
“ILLE HIC EST RAPHAEL TIMUIT QUO SOSPITE VINCI
/ RERUM MAGNA PARENS ET MORIENTE MORI”
"살아 있을 때 자신을 능가할까 봐 두려워 했던 모든 것들의 어머니(자연)에 의해,
여기 라파엘로가 묻혀 있다."고 새겨져 있다.
현재의 배치는 1811년 이후의 것으로, 안토니오 무노스가 설계한 것이다.
무덤 뒤에 있는 "바위의 성모" 조각상은 로렌체토가
라파엘로가 의뢰를 받아들여 1524년에 만든 것이다.
화가인 안니발 카라치, 작곡가 아르칸젤로 코렐리,
건축가 발다사레 페루치 등도 이곳에 묻혀 있다.
근세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움베르토 1세 두 왕이 묻혀 있으며,
움베르토의 배우자인 마르게리타 왕비도 묻혀 있다.
1946년 이후 공화국이 되고 공화주의자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이탈리아 군주주의자들은 판테온의 왕족 묘지를 감시했다.
이탈리아 문화유산부에서 이 건물을 보호하고 있었음에도,
교황청에서는 이러한 감시 행위를 승낙하였다
입구에서 오른쪽 첫 번째에 있는 벽감에는 작자 미상의 그림인 거들의 성모와 바리의 성 니콜라오(1686)가 있다.
오른쪽에서 제1경당은 성모 영보 경당으로,
15세기 전체적 그림 장식때 멜로초 다 포를리가 그린 성모 영보 프레스코화가 있다.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는 판테온 현관의 청동 천장을 녹여
대부분을 산탄젤로성 방어를 위한 사석포(射石砲)를 만들었으며(포탄),
남은 청동은 교황 궁무처가 사용했다.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는 설도 있으나
발다키노의 청동은 베네치아에서 공수해온 것이라 한다.
1840년, 루이지 폴레티가 설계한 성가대석이 추가되었다.
주랑 현관은 원형 홀을 향해 열려 있는데, 이 원형 홀 위에는 소란 반자들로 장식된 콘크리트 돔이 있다.
이 콘크리트 돔 가운데의 개구부는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
4.5톤 중량의 콘크리트 돔은 9.1m 지름의 개구부를 형성한다.
돔 아래를 향한 추력은 6.4m 두께의 원통형 벽 안에
여덟 개의 원통형 둥근 천장들로 분산되어 기둥까지 온다.
돔 두께는 기초 부분에서 6.4m 개구부 주변에서는 1.2m이다.
개구부까지의 높이와 실내 원의 지름은 43.3m로 일치.
판테온은 철근이 들어 있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콘크리트 돔.
지붕 내부는 천국의 궁창을 상징하는것 같다.
돔의 개구부는 빛이 들어 오고 냉각 통풍과 무게줄임의 기능이 있다.
비가 뿌릴때는 바닥의 배수조로 빗물을 조절한다.
움푹 들어간 소란 반자들은 장식적 기능을 하면서 천장의 무게를 줄여 준다.
원형 홀 벽 꼭대기의 벽돌로 된 무게 경감 아치,
움푹 들어간 안쪽에 있는 경감 아치등
여러 장치들은 대리석 아래에 있으며, 외부는 회벽이나 석재 벽
판테온 광장에 있는 243대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기념비
세속명; 조반니 프란체스코 알바니.
유럽의 열강들은 전쟁 중이고 교황청이 중립을 지키기 어려워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는 시기에 교황은 청나라의 전례를 금하는 회칙을 내렸다.
이에 청나라 강희제는 칙령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은 허가하나, 포교는 불법화시켰다.
이 때의 전례가 지금까지도 내려와 중국에서는 종교활동 허용,포교 불가이다.
클레멘스 11세는 선교와 빈민구제 사업에도 열성적이었다
판테온 앞의 광장
판테온에 사용된 콘크리트는 인근 화산의 가벼운 부석과 소석회를 사용했는데
현대의 콘크리트와 비슷하게 인장강도가 뛰어났다.
판테온이 서양 건축사에 끼친 영향은 크다.
대표적으로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파리의 판테온등
세계 각국의 수많은 공공건물에서 판테온의 흉내를 낸 모습을 볼 수 있다.
판테온에서 도보로 트레비 분수에 왔다.
트레비 분수 앞의 유명한 젤라또 가게 앞
20년 전의 중년신사 대신 젊은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었고
옆 골목에 경쟁 가게가 하나 들어 선 것 외에
손님이 붐비는 것은 여전하였다.
메뉴는 20년전에 비해 많아졌다.
그때는 아이스크림과 빵 종류였던 걸로 기억한다
우측 골목 입구에 새로 생긴 가게
트레비분수(Fontana di Trevi)와 우측 폴리궁전
로마에서 가장 큰 분수로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 중 예술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1453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명으로 만들어졌으며,
1762년 교황 클레멘스 13세가 설계를 공모하여
니콜라 살비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재단장 하였고, 폴리궁전 앞에 설치했다.
해신 포세이돈을 중심으로 그 아래로는 말과 함께 두 개의 트리톤(포세이돈 아들) 상이고,
왼쪽은 풍랑의 바다 오른쪽은 잔잔한 바다를 상징한다.
트리톤 상위에 서있는 네명의 여인은 사계절을 상징,
트리톤상 옆에 있는 두명의 여인은 각각 건강과 풍요의 여신을 상징.
분수의 수원은 "처녀의 샘"에서 발원-,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로마 병사들에게 물을 제공해준 처녀 설화가 담겨있는 곳.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거나 다시 로마에 오게 된다는 설화가 있어
매일 3,000유로 정도가 분수대에 쌓이는데, 시당국이 동전을 수거한다고 한다.
스페인 광장을 뒤에 두고 트리니타 데이 몬티 계단(스페인계단)을 오른다.
영화 "로마의 휴일" 덕택에 수만리를 날아 별 의미없는 이곳을 두번이나 찾는다.
스페인광장은 스페인 대사관이 있어 스페인광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 앞에 있는 살루스티아노 오벨리스크Ovelisco Sallustiano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복제한것으로
살루스티우스 정원을 정비하던 중 출토된 것을 스페인 계단앞 몬티 성당에 가져온것.
살루스티우스 정원 (Horti Sallustiani)은
기원전 1세기, 역사가 살루스티우스가 만든 정원으로
로마 핀초언덕과 퀴리날레 언덕 사이에 자리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