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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도시-,피렌체

정의파파 2024. 7. 4. 16:32

여행 3일째

오늘은  Bus를 8시간 이상 타야한다.

베니스에서 피렌체까지 4시간, 4시간 반을 더 달려 로마까지.

중간에  휴게소엘 들렀다.

유럽의 화장실은 보통 유료인데(1유로) 고속도로 휴게실은 무료

편의점의 입출구가 다르고 일방통행.

나올 때는 상품이 진열된 매대를 경계로 쭉 따라 진행하다 보면 출구가 나온다.

화장실 앞은 인산인해!  특히 여자 화장실 앞 줄서기는여기도 마찬가지-,

어제는 서쪽 밀라노에서 베네치아를 향해 동쪽으로 달렸는데

오늘은 베네치아에서 피렌체와 로마를 향해 남서쪽으로 향한다.

피렌체를 안내할 남자 가이드분이 동승하여 쉴 새없이 해박한 정보들을 털어 놓는다.

베네치아가 상대적으로 알프스 남쪽자락의 높은 지역이었는지

계속해서 내리막 길이 이어졌다.

풍치가 좋아 직접 차를 운전한다면 세워 놓고 쉬었다 가고 싶은 풍경이다. 

 2시간여를 교회종탑 등이 보이는 평화로운 길을 달려 피렌체에 도착했다.

 

천재들을 버린 도시-피렌체

피렌체(Firenze, Florence)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피사, 시에나 리보르노)의 주도이며 시청 소재지 이다.

1982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선정.

인구는 38만명, 광역 인구로는 약 150만 명.

로마시대 북방 요도인 카시아 가도에 위치하고

중세의 유럽 무역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르네상스의 본고장이다.

1865년에서 1870년까지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

분지에 위치하여 주변에 아르노 강과 세 개의 다른 강이 흐른다.

온난 다습. 여름은 강우량이 적고 겨울이 서늘하고 습한 것이 특징.

해안 도시보다 여름 온도가 높다

1983 6 42.6로 최고기온을, 1985 1 23.2로 최저기온을 기록했다

 

피렌체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세계의 도시 중 가장 역동적인 도시의 하나 였다.

14세기 이탈리아 문학인들은 피렌체 방언을 문학 언어로 사용했고,

피렌체 은행가들은 백년 전쟁 동안 잉글랜드 왕을 지원했으며,

아비뇽의 수도 건설에 협력하고, 로마와 교황청도 지원했다 

 

피렌체의 역사

B.C.200년 페투리아인의 피에솔레(Faesulae)라는 정착지가 피렌체의 시작. 

                  피에솔레는 150년 후인

B.C. 80년 로마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에 의해 파괴되고,

B.C. 59년 시저가 친위부대 정착지로 건설한 후 플루엔티아(Fluentia)라 명명.

                 에 강에 둘러 쌓여 있다 하여 플로렌티아(Florentia,흐름)라 개명

                 친위부대는 현 레푸블리카 광장에 건설됐는데 상업 중심지로 발전.

              수 세기 후, 플루렌티아는 동 고트 인들이 지배하게 되었고,

                이 기간에 동 고트 인들과 비잔티움 사이에 전쟁이 잦았으며,

                6세기에 롬바르디아족에 점령당했다.

  774년 샤를마뉴가 정복하여 토스카나 공국으로 편입되었으며 루카를 수도로 지정.

1000년, 우고(Ugo)가 다시 피렌체를 수도로 하였고 당시 피렌체는 미술의 황금기.

1013년 산 미니아토 교회 건설을 시작.

1059년 부터1128년 사이 산 조반니 세례당의 외부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축.

1406년 피렌체는 피사를 정복한 제노바를 정복하였다.

            자노 델라 벨라가 이끈 반 귀족주의 운동과 전문 상업형태가 힘을 떨쳤다.

1348년 흑사병전 인구 94천여 명 중 30%인 25천명이 양털 산업에 종사.

1378년 치옴피(양털 노동자ciomi)의 폭동이 발생.

13821434 치옴피폭동을 진압시킨 알비치 가문이 득세하여 메디치 가문과 경쟁.

            15세기 피렌체는 유럽 도시 중 가장 크게 성장, 반면  빈부의 차이도 발생.

           코시모 데 메디치- 피렌체를 통치한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인물.

            이주민인 젠타 누오바(gente nuova;새로운 사람들)의 지지로

            민주체제인 피렌체를 통치.

            은행을 매개로하여 교황을 도운 후  아들 피에로에게 양위했으나,

1469년 실권은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가 장악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등을 후원.

              또한 수많은 작곡가와 가수들도 후원하여 피렌체인들은, 

             그를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라 부른다.

             산 마르코 수도원 원장인 도미니코회 사보나롤라 수사는,

             메디치 가문의 부도덕과 물질적 집착을 꼬집어 하나님의 징벌을 훈계 했다.

             사보나롤라는 개혁을 통해 민주적 통치를 이끌 기회를 잡았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고발 후 그의 설교는 금지되었다.

             그가 이 금지 사항마져 어기자 파문되었다.

             또한, 사보나롤라의 진보적 가르침에 반발한 피렌체 인들은

              그를 이단으로 고발하여 1490년 화형 시켰다           

1490년 로렌초가 같은 해에 사망하자

1492년 로렌초의 아들인 피에로 2세가 지위를 승계.

            이탈리아 북부 침략한 프 국왕 샤를 8세의 대군에  맞섰으나 피사에서 항복.

           항복에 반대하는 피렌체 시민들의 폭동을 야기시켰다. 이 결과,

1494년 피에로2세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복원. 메디치 가문의 통치가 끝났다.

             마키아벨리가 메디치를 의식한 "군주론"을 집필하여

            편법과 위법을 용인하는 강력한 군주하의 피렌체 재건을 주창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압력으로, 마키아벨리는 또한 피렌체 역사서도 집필했었다.

1527년 메디치의 후손을 몰아내고 피렌체공화국이 재 건국되었으나

1537년 메디치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의 지원으로,

             다시 피렌체의 세습공작이 되었으며,

1559년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레오 와 클레멘스 등 두명의 교황을 배출하고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혼인, 

            앙리 사후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으며.

1569년 메디치는 토스카나 대공작이 되었다.

            토스카나 지방 중

            루카 공화국(훗날, 공국)과 피옴비노 후국이 피렌체에서 독립 상태로 남았다.

1737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의 사망으로 메디치가 시대의 막을 내렸다.

             프란츠 1(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로렌 공작)가 즉위하여

             토스카나를 오스트리아 왕령지에 편입후 합스부르크 로렌 가문의 분가 가문,

1765년-1790년 사이 레오폴드가 토스카나의 대공이 되었다. 

1801년 피렌체는 부르봉 파르마 가에 속하게 됐으나

1807 12월 프랑스가 토스카나를 병합하면서 부르봉파르마는 폐위된다.

1808년-1814년 사이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기간

             토스카나는 프랑스 아르노 데파르망의 행정 구역에 속했다.

1859년 합스부르크 로렌 가문이 폐위되자.(빈 회의에서 토스카나 대공 작위는 회복)

1861년 토스카나-이탈리아 왕국의 행정 구역 으로 되었고,

1865 피렌체는 토리노를 대신해 이탈리아의 수도로.

            피아자 델 메르카토 베키오의 옛 상가와 주택을 헐고 계획 거리로 대체하여

            피아자 광장을 넓히고 서쪽에 개선문을 세웠다.

            (과거,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 현재 레푸블리카(공화국) 광장이라고 불림)

1871 수도가 피렌체에서 로마로 대체되었고

            19세기에는 피렌체의 인구가 두배로, 20세기에는 산업의 발달로 3배로 증가.

            20세기에 들어서 로마 주둔 프랑스군이 철수하여

            피렌체가 이탈리아에 합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2차대전 중 독일군과 대치했던 미군은 남쪽에,

           영국군과 영연방군은 아르노 동쪽에 주둔했다.

1944년 퇴각 독일군이 영국군 도강을 막고자 올트라노(Oltrarno) 지구를 연결하던

             아르노 강의 다리들을 파괴했으나 

             베키오다리는 독일의 하를레 슈타인 하우슬린 장군이 부수지 않았다.

             그 후 아르노 강 다리들은 남아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복원되었고, 

             주변 건물들은 현대 고전의 혼합 형식으로 재건.

1945년 전역자를 위한 미국인 항공 학교가 세워졌고,

1966 11월에는 아르노 홍수로 많은 예술품이 해를 입었다.

미켈란젤로 언덕 

걸어서 오르는 길.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본 피렌체-

언덕앞에 아르노강이 흐르고 멀리 피렌체 성당과 종탑,베키오궁전이 보인다.

탄생 400주년에 맞춰 세워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모조품-.

진품은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다.

             왜 다비드 광장이 아닌 미켈란젤로 광장이라 했을까?

              동상의 주인공 다윗보다는  피렌체인에 의해 밖으로 내쳐진 위대한 영웅

미켈란젤로에 대한 속죄의 마음이 커서 일 것같다.

피렌체를  떠난 미켈란젤로를 그리워하며

그의 작품을 피렌체가  보이는 언덕에 세운 피렌체 사람들!

과거를 돌아보는 피렌체인들의 외침을 느껴 본다. 

 

미켈란제로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1475-1563).

이탈리아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의 위인들을 끝이 아닌 첫 머리 성을 호칭으로 사용.  

그는 르네상스 시대 가톨릭 교회를 고객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대표적 조각가, 건축가, 시인 그리고 고급화가 였다.

13세때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에서 화가 도메니코에게 그림을 배우게 하여 

베르트르드 디 조반니를 통하여 도나텔로 풍을 배웠다.

1501년 피렌체 시청의 부탁으로 소년 다윗 조각을,  

             원형 부조인 성 모자와, 원형화 성 가족을 그렸다.

1504년 시청의 위촉으로 대회장의 벽화 카시나 수중 접전도를 그리게 되었는데,

            맞은편 벽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앙기아리 기마 접전도”와  경쟁.

1505년 미켈란젤로는 신임 교황 율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로 들어와.

            베드로 대성당의 교황들의 묘와 40개의 조각 일에 위촉되어 4년간 봉직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맡았던 브라만테 등 경쟁자들로 부터

            끊임없는 방해를 받아 만족스럽게 끝내지 못했다.

           *(1516년에 완공한 '모세 동상"과 '반항하는 노예 죽어가는 노예'의 

             묘실의 2개 조각상은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 천장 그림 제작을 부탁.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깔판 위에 누운채 일했고,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과 눈병도 생겼다.

1512년 완성된 시스티나 천장벽화는

             마태복음의 그리스도의 족보천지창조부터 노아까지의 구약의 내용 이다.

             천장 벽화 완성 후 산 로렌초 성당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으며,

1529 독일 카를 5세 군의 피렌체 포위 때 방위 위원으로 성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1534 메디치 가의 알레산드로와 불화로, 고향인 피렌체를 영원히 떠나,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6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였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미켈란젤로를 무시하는 어떤 추기경을 오히려 무시하였다 한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그려줄 것을 부탁,

1550년 바티칸 바오로 경당에 벽화 바오로의 회심 십자가의 베드로"를 그려, 

            그림 속에 타락한 교회 지도자를 비판 표현하였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 돔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성 베드로 대성전, 팔레스티나, 론다니니의 피에타 

            세 피에타의 상도 미완성으로 남긴채,  

            89세를 일기로-,1563년 생애를 로마에서 마쳤다.

           그의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

           *미켈란젤로의 십자가 (1492)목판 --------성모 마리아와 성령 성당, 피렌체

           *미켈란젤로의 성 페트로니오(1495)석상---성 도메니코 성당, 볼로냐

           *미켈란젤로의 성 프로쿨루스(1495)석상---성 도메니코 성당, 볼로냐

           *미켈란젤로의 천사 (1495) 석상----------성 도메니코 성당, 볼로냐

           *바쿠스 (1496-1497) 석상-------------바르젤로 국립 미술관, 피렌체

           *피에타 (1499-1500) 석상------------ 성 베드로 성당, 로마

           *다비드 (1501-1504) 석상------------ 아카데미아 갤러리, 피렌체

           *성 가족(도니 톤도) (1506년경)그림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1512)프레스코화-----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최후의 심판 (1541) - 프레스코화----------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위키백과)

                                       아르노 강을 건너 시가지로 들어 왔다.                                                                 

산타 크로체광장과 산타 크로체 성당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시인 포스콜로, 철학자 젠틸레, 작곡가 로시니  

이탈리아의 저명 인사들이 묻혀 있어

            이탈리아 영광의 교회(Tempio dell'Itale Glorie)로도 알려져 있다.

산타크로체 성당 옆의 단테의 상

 

단테가 다시 돌아오기를 고대하던 피렌체 시민들은

르네상스 천재들의 주검이 모셔져 있는 산타 크로체 성당에,

테를 위한 ‘빈 무덤’을 만들고 신곡의 지옥편에서 인용하여 묘비에 이렇게 썼다.

   “Onorate l’altissimo poeta, L’ombra sua torna, ch’era dipartite”

     (위대한 시인을 찬양하라. 떠났던 정신이 귀환하였도다)

단테의 유해는 이곳 아닌 라벤나의 산 피에르 마조레 성당에 있다.

단테의 시신을 매장한 라벤나의 산 피에르 마조레 성당은

단테의 가짜 무덤을 만들 정도로 피렌체 사람들의 도굴을 우려했다. (위키백과)

두오모로 가는  골목길 공방- 진품을 앞에 두고 모조품석상 제작이 한창이다.

   꽃의 성모교회,피렌체두오모(Santa Maria del Fiole)

  입장하기 위해 선 긴 줄. 

            성당과 종탑 지하실 세례당을 한꺼번에 입장할 수 있는

통합입장권을 인터넷으로 예매할 수 있다 한다.

            예매했다 해도 빠른 입장을 위해 일찍 서둘러 줄을 서야하는것은 매 일반이다.

106m높이의 돔은 브루넬레스코가 설계하였고 

463개의 계단 끝에 일본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주인공 아오이와 준세이가

아오이의 30번째 생일인 10년 후 만나자고 약속한 장소 전망대가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눈에 띈다.

 내부의 북쪽 벽면에는 Domenico di Michelino(1417~1491)

1465년(단테 탄생 200주년)에 그린 단테와 신곡이 전시되어 있다.

 피렌체 의회의 회의장이기도 했었던 이 대성당에서

로렌초 데 메디치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1478년 부활절에 피살되기도 했다.

피렌체 대성당

 

피렌체 인구 증가로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밀라노 대성당 규모의 성당이 필요했고,

때마침 피사와 시에나에서도 새로운 성당이 건축되자,

기존의 좁고 낡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 자리에 건설하게 되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한 새 성당은

세 개의 넓은 중랑(中廊)이 팔각형 돔 아래에서 끝나도록 디자인했으며,

가운데 중랑은 옛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영역을 감싸도록 했다.

1296 9월 발레리아나가 추기경일 때 공사를 시작.

1302년 아르놀포가 사망하자 공사가 중단되고

1330년 성 제노비오의 성유물이 발견되면서 다시 공사가 시작되었고

1331년 양모 상인 조합 길드가 후원하자

1334, 조토 디 본도네는 캄비오의 설계를 바탕으로 종탑 공사를 진척시켰다. 

             조토 사후에도 안드레아 피사노가 공사를 계속.

1349년 흑사병 창궐 이후 프란체스코 탈렌티는 종탑을 완성했고

1359년 조반니 디 라포 기니(13601369)

1369년 까지 탈렌티의 뒤를 이어 가운데 중랑을 완성했으며

         알베르토 아르놀디, 조반니 담브로조, 네리 디 피오라반테, 오르카냐 등이 참여

1375년 낡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헐렸고,

1380년 네이브가 완성, 오직 돔만이 미완성 상태였다

1418 실외벽은 하얀, 초록, 붉은색의 대리석으로 덮었다.

            이 대리석 배열은 산 조반니 세례당과 조토의 종탑의 벽에 있는 배열을 모방 

            이후 이 대리석 색상은 이탈리아 국기에 반영 되었다.

             Canonici(남쪽) Mandorla문에는

             난니 디 방코, 도나텔로, 야코포 델라 퀘르차의 작품들이 장식되어 있다.

            익랑(翼廊)에서 가까운 네 개의 창문에 빛이 들고, 다른 장식 창이 둘있다.

            클리어스토리 창(고측창)은 둥근 모양으로 이탈리아 고딕의 전형적 특징.

1419년 양모 상인 조합은 대성당 돔의 설계안을 공모했다

             공모에 응한 자 중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선택됐고

            최종적으로 브루넬레스키의 설계가 낙점을 받았다.

1420년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에서 영감을 얻어 이미 폐기 된 콘크리트법을 응용,

            석재 아닌 벽돌 돔 공사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나무로 벽돌 모형을 만들었다.

            지붕 위가 아닌 드럼에 벽돌을 얹은 이중벽 구조의  8각형태의 돔으로, 

            비계를 설치하지 않고 건축된 최초의 돔이었다.

            그러나 돔이 지지해주는 버팀 벽 없이 드럼에 얹혔기 때문에, 

            돔의 기초에 나무와 철로 된 수평의 사슬을 만들었다.

            돔의 무게는 3.7톤이고 4백만 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그는 공사 중 특수 기계와 여러 모형의 세부 도면을 설계했다.

            기베르티가 황당하다고 반대하자 브루넬레스키는 칭병하여 로마로 기피.

1423년 기베르티가 한계를 인정하자 브루넬레스키가 돌아와 공사를 진행시켰다

1436년 완성되었고 돔의 완공에 맞추어 그해 3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피렌체 대성당을 축성(祝聖)하였다.

            이 돔은 최초의 팔각형 돔으로 현재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다.

            돔이 완성되자 이제는 맨 꼭대기의 창 있는 작은 첨탑의 설치가 필요.

            브루넬레스키는 또 첨탑 설계에 응모해

           경쟁자인 로렌초 기베르티와 안토니오 차케리를 꺾고 설계 공모에 당선.

           사방의  버트레스와 여덟 개의 높은 아치창, 팔각형의 랜턴이 그의 디자인

           돔에 비해 매우 작은 이 랜턴은 여러 건축가가 매번 설계를 변경하여

1446년 브루넬레스키가 사망하기 직전 랜턴 건설이 시작되어 15년간 공사 끝에

1461년 그의 친구인 미켈로초에 의해 완성되었다.

           대성당의 돔과 랜턴의 총 높이는 114.5m.

           원뿔 형태의 천장에는 도금된 구리 공과 십자가가 씌워졌는데,

           구리 공을 랜턴 위에 놓는 작업은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맡았다.

           당시 그의 작업실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젊은 수습생으로 있었다.

           브루넬레스키에 자극받아 베로키오도 자기가 만든 공을 들어 올리려 하자

           레오나르도가 이 기계에 관한 여러 모형을 그려 주었다. 

           그 때문에 레오나르도의 발명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469년  베로키오의 구리 공이 설치되자 비로소 150년에 걸친 성당건축이 끝났다.

            *이 공은 1600 7월 벼락을 맞고 떨어져 2년 뒤에 더 큰 것으로 교체.

            ☆ ( 150년 후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돔이 이 돔의 규모를 뛰어 넘게 된다.)☆

              직경 45m 돔의 실내장식은

              모자이크로 덮어 랜턴을 통해 빛이 들어오도록 할 예정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둥근 천장을 희미하게 빛나는 금빛으로 표현하려 했지만, 

그가 죽자 돔 내부는 하얀색으로 칠해졌다.

             

 피렌체의 코시모 1세 대공은 돔에 최후의 심판의 그림을 그려 넣기로 작정했다.

 1568년 조르조 바사리와 페데리코 추카리가

              60m X 60m의 방대한 채색작업을 시작하여11년간 계속.

 1574년 조르조 바사리가 랜턴쪽 부분을 계시록 4장의 24장로를 묘사하여 완성했다.

             페데리코 추카리와 도메니코 크레스티 등의 협력자들은 위에서부터-

             천사들의 합창,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 , 

            성령의 선물, 행복, 아랫부분에는 죄와 지옥을 완성시켰다.

            이 프레스코 화들은 추카리의 역작으로 꼽힌다.

            바사리는,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리는

            부온 프레스코(buon fresco) 기법을 사용하였지만,

            추카리는, 회반죽이 마른 후 그리는 프레스코-세코(Fresco-secco)기법 인용.        

 전면은,캄비오가 설계했는데 사실은 조토의 공적이었다 한다.

           조토 사망후 20년만에, 정면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여러 예술가가 번갈아 아랫부분만 완성시켰으나 나머지는  미완성 상태였다.

여러 사람의 공이 들어갔는데 왜 조토의 종탑이라할까?

         그만큼 설계가 중요해서 일것 같다.

 

1587년 피렌체 메디치 궁정의 건축가인 베르나르도 부오탈렌티는 

             당시 시대에 맞지 않은 전면 부분을 분해해 버렸다.

             분해된 조각들은

             대성당 뒤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과 베를린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새로운 설계공모가 부패에 연루되자 외관은 장식되지 않은 채 내버려졌다.

        1864년 새로운 설계 공모가 열렸고,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의 설계안이 

        1871년에 채택되었다.

        1876년 공사가 시작되 11년 후 완공되었다.

 1903년 4년간의 공사 후 세 개의 청동문이 완성됐다.

문에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가 그려져 있다.

              가운데 정문 위의 박공벽은 꽃으로 장식된 홀을 들고 옥좌에 앉은 마리아.

                        장미창과 입구 위쪽과 지붕 사이에 있는 박공의 삼각면에는

피렌체 예술가들의 흉상이 있는 갤러리가 있다.

성당의 뒷면-,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주보랑

 최근 보수공사중 벽돌이 떨어져 스페인 관광객이?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한다.

 

(대성당)피렌체 대성당은,

네이브와 두 개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로마 십자가 형태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축.

            벽 기둥에 붙어 있는 첨두 아치가 중랑을 네 개의 정사각형 베이로 나누고

            측랑과 익랑의 창은- 신구약 성경의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고

            신랑의 창- 마리아에게 왕관을 씌우는 그리스도의 모습.

            돔의 원통안과 출입구 위 둥근 창- 그리스도와 성모가 묘사

            중앙 제대 뒤의 십자가상은 베네데토 다 마이아 노 (1495-1497)의 작품. 

            성가대석은 바르톨로메오 반 디넬리 작

            제의실의 촛대를 든 천사와 그리스도의 부활 테라코타 상-

                   루카 댈라 로비아의 작품.

            진의 중앙 뒤쪽, 성 제노비오의 제대(피렌체 최초의 주교)- 

                   기베르티의 작품.

            후진의 성소 위- 마지막 만찬, 조반니 발두치 작.

            대성당에는 피렌체의 저명한 인물들을 그린 작품이 있다.

             *단테의 신곡.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 작(1465)

             *호크우드 경의 기마상. 파올로 우첼로 작. (1436)

             *니콜로 다 톨렌티노의 기마상.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작. (1456)

             *조토의 상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 작.

             *브루넬레스키의 상 부지아노 (1447)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안토니오 스콰르치알루피(오르간 연주자)의 상.

            *정문 위 시계의 네 모서리에는 4복음서 저자의 프레스코 초상화가 있다. 

                      파울로 우첼로 작 1443.

                      바늘이 하나인 시계는 18 세기부터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다.

           * 4개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파올로 우첼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등 작품

           *열개의 청동 문- 루카 델라 로비아의 작품.

           *유색의 대리석- 바초 다뇰로와 프란체스코 다 상갈로 의 작품 

                                                                                                                                                  

 ※성당의 구조                                  

        익랑  
배랑 측랑  

신랑(Nave) 또는 중랑 교차랑 내진 후진
측랑      익랑  
   

                                                                                       

 (지하실)지하의 볼트(vault)들은 피렌체 주교들의 무덤.

  1965년부터 9년간 지하의 발굴이 시작됐다.

  로마 가옥, 기독교 초기의 포장도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폐허와 그 후의 공사현장이 드러났다.

  입구에 브루넬레스키의 무덤도 주교들의 주검과 함께 있었다.

 

성 죠반니 세례당

    세례당에 입장하기 위해 또 긴 줄이 늘어 서있다.

1059년부터 59년간 외부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축.

 1401년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을 놓고 건축가들이 경합했다

청동문

                         신곡 천국 편 제25장; 지금 비록 목소리 바뀌고, 머리 털 색도 달라졌지만 시인 되어 나 돌아가리.

          례당 성수터에서 월계관을 쓰리"

                  세례당”은 이곳 세례 요한 세례당(=성 죠반니 세례당)을 말한다

두오모 성당에서 시뇨리아광장 골목길에 있는 단테의 생가

(단테의 집)- 단테 박물관

피렌체에서 유일하게 단테의 생애와 작품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곳.

원래 단테의 집(Casa di Dante)’으로 추정되었지만,

 지금은 피렌체 시에서 운영하는 단테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때 단테를 추방했던 피렌체는,

단테가 돌아오기를 고대했지만, 단테는 1321 56세로 라벤나(Ravenna)에서 사망.

1865년 단테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여 생가 논란이 있는 이곳을 단테의 집으로 명명.

1911, 피렌체시의 의뢰로 건축가 Giuseppe Castellucci가  카사 디 단테를 보수.

근처에 아홉살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났다는 산타 마르게리타 성당이 있다.

12세의 단테가 젬마 도나티(Gemma Donati)와 원치않는 결혼식을 올린  이 성당에, 

베아트리체와 젬마, 두 여인의 무덤이 있다.

 

*단테, (Durante degli Alighieri,1265~1321)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il sommo poeta)

 1265년에 피렌체에서 태어나 1321년 라벤나에서 말라리아로 병사(病死).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후 13년의 역작 신곡으로 르네상스의 문을 연 인물!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사랑은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향한 경직된 신앙에서 돌체(Dolce)의 신앙을 알게 했.

 단테 이후 개개인의 감정이 존중을 받았고

 새로운 가치를 쫓는  Renaissance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베키오 궁전과 시뇨리아 광장 (궁전의 입장행렬이 보인다.)

 

베키오 궁전; 1298년 시공후 1322년 완공.

16세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췄으며 현재 피렌체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중앙의 종루 높이는 93m.

2층에 바사리와 그 일파가 그린 메디치의 전투장면 회화가 장식되어 있다.

교황 레오 10세의 거실과 메디치가문의 방이 있다.

 메디치1세의 기마상,

근처 넵튠의 분수는 보수작업으로 천막이 내려 있었다.

*넵튠; 로마 신화의 바다의 신. 

넵투누스는 에트루리아 신화(Etruscan mythology)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한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B.C.753~B.C.509)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로마 공화정(기원전 509~기원전 27)때 로마에 정복당했으나

에트루리아 종교와 신화의 많은 부분은 고대 로마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에트루리아 종교를 받아들였고

로마 제국(기원전 27~476/1453)의 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자신들이 에트루리아 후손임을 주장하여  얼마간 에트루리아 언어와 종교를 유지. 

이들의 정전(正典)들이 기원후 500년경까지 있었으나 기독교에 의해 사라졌다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박물관 앞에 위치. 피렌체의 정치 사회의 중심지였고. 

현재는 카페, 테라스가 있는 시민들의 휴게소와 같은 곳이다.

교황의 부도덕을 비판한 기독교 근본주의자 수도사 사보나 롤라가 화형 당한 곳

 

맨 우측 잠볼로냐사빈 여인의 강간상

사보나 롤라가 당시 시대를 비판한 것과 괘를 같이하는 표현이었다. 

맨 좌측 청동상은 조각가, 화가, 음악가. 군인, 자칭 모험가,무뢰한,호색가인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페르세우스 청동상".

위는 칼로 베어낸 머리, 아래는 메두사의 몸통.

*페르세우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최초의 영웅으로, 

미케네를 건설하고 미케네의 페르세이드 왕조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라고 전해진다.

티린스 왕 프로이토스는  쌍둥이 형 아크리시오스가

손자에게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전해 듣고 아크리시오스 행세를 하여

형의 딸 다나에를 겁탈. 분노한 형 아크리시오스는 프로이토스를 추방. 

또 아크리시오스는 손자가 자기를 죽이게 된다는 예언을 믿고

딸 다나에와 그의 조카 페르세우스를 큰 궤짝에 넣어 바다에 던졌는데, 

궤짝은 세리포스 섬에 닿았고 페르세우스는 그곳에서 자라게 되었다.

한편 다나에를 아내로 맞고 싶어 하던 세리포스 왕은

흉계를 꾸며 페르세우스에게 죽지 않는 도르곤,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도록 지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찾아 이집트의 친척들의 도움과 함께 리비아로 가서, 

메두사의 머리를 취해서 돌아오던 길에

바다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진

아이티오피아의 공주 안드로메다를 구하고 결혼하여 왕비로 삼았다. (위키백과)

측- 미켈란젤로의 모조품 다비드상 

뒷 건물은 우피치박물관( Piazzale degli Uffiz),  우측 갈릴레오 박물관

아르노 강을 가로 지르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베키오다리; 오래된 다리라는 뜻. 중세에 만들어 졌다.

                 다리 위는 처음 푸줏간 가게가 있었으나, 지금은 보석상, 미술품 거래상과 선물 판매소가 있다.

베키오 다리 위 좌우에 있는 보석상점

아르노강은  북쪽 빌랑키노 호수(lago di bilancino)에서 발원하여

서쪽 피사를 통과한 다음 지중해로 간다.

베키오 다리 뒤편에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우연히 만난 산타 트리니타 다리가 있다.

우피치 미술관과 미켈란젤로 언덕 쪽 피티 궁전을 잇는 역할을 하며,

2차 대전 중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았다

하수도 뚜껑과 보도 블럭-

보도 블럭은 땅 속으로 적어도 20cm는 묻힌것 같고

뚜껑은 지면과 수평이 잘 맞아 보행에 불편이 없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명품.)

시뇨리아 광장에서 아르노 강 쪽으로 나오니 건너편에 미켈란젤로 언덕이 보인다

 이탈리아도 소나무를 가로수 혹은 정원수로 많이 활용한다.

   나무 아랫 쪽은 모두 잘라내고 상부 쪽만 남긴다.

   도심 그늘에 가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심의 소나무 전정은 아랫가지를 자르는 방법이 옳을 듯

남동쪽을 향해 2시간여를 달려 휴게소에 정차.

 휴게소 명칭을 우리처럼 휴게소라 하지 않고 식당으로 표기.

 중국에서 호텔을 00 반점---하는 식으로.  

이곳도 일방통행. 입구와 출구가 다르다. Uscita-출구 표시가 있다.

로마에 가까워지자 철로가 보인다.

이탈리아는 철도가 잘 발달되어 있다.

땅만 파면 유적지라서 개발이 용이한 철로를 생각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