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헌금
개신교에서는 집사, 권사, 장로 등의 항존직 임직식을 할 때
임직 당사자들이나 혹은 당회의 회의를 통하여 임직자들이 기념할만한 기념품이나 헌금을 바치는 경우가 있다.
당사자들의 힘이 닿으면 교회에 필요한 비품이나 조형물 등을 기념으로 남기는 일도 있고
임직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낸 할당금으로 축하차 참석한 성도들이나 당회장 목사님께 작은 기념품을 선물하는 일은 일반화 되어 있다.
하지만 통과 의례처럼 되어 있는 이 일로 인하여 상처받고 시험받은 사람들이 허다하다는 사실을 개신교에서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야 한다.
하루빨리 헌법이나 조례를 제정하여 이에 관한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본다.
임직식에 초청되어 오는 예식의 담당자들에 대한 예우도 마찬가지다.
비단 임직식의 문제 만이 아니다.
부흥회 강사는 차치 하더라도 각종 헌신예배나 수련회의 강사들에 드리는 초청비는 예우 차원이 넘어
특정 유명 부흥사 강사들의 축재의 수단으로 치부되어 있다.
청년회 헌신예배에 필자의 친구인 어떤 신학교 교수 목사님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예배가 끝난 후 교통비 명목으로 강사료를 드리자 두 손을 저으면서 강하게 받기를 거부한다.
“그냥 감사 헌금으로 바친다고----”
이분 교수 목사님의 행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강사로 가는 곳마다 이렇게 했었다는 것이다.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립보4:18)”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은 어떤 것일까?
바로 그 목사님이 바치는 헌금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임에 틀림 없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
셀 수도 없이 들어온 말씀이다.
한국 개신교의 강단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는 필수단어는 아마도 “감사“ 일 것이다.
구약 역대상 16장 29절에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 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 지어다
Bring An Offering(헌금) and come before him : worship the Lord in the splendor of his holiness“라 기록되었고
제물을 영어 성경에는 Offering(헌금)이라 번역하였다.
우리 성도들은 대부분 강단에서 감사라는 언어가 튀어 나올 때마다 “헌금”을 떠 올린다.
더 큰 감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더 많은 액수의 헌금을 고려하다 은행 대출까지 생각하게 된다.
성도들이 그러할진대 단 위에 서신 설교자들도 혹시 감사를 헌금으로 연상하여 말씀을 전하지는 않는 것일까?
실제로 헌금과 연계하여, "감사 생활 많이 하는 성도들이 더 많은 복을 받는다"고
스스럼없이 강단에서 설교하시는 목회자는 무수히 많다.
“감사=헌금“ -이는 분명 잘못된 생각이다!
“더 많은 헌금=더 큰 감사? 이는 더더욱 잘못된 판단이다.
누가복음 17장 15절에는 예수님께 고침 받은 나병환자 10명 중 한 명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 장면이 나온다.
그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드렸다.
돈 없이 값없이 맨손으로 큰 소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마가복음 12장 43절에는 가난한 과부가 엽전 몇 푼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고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노라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셨다.
사도바울이 기록한 헌금에 관한 말씀을 옮겨 보면-,
고전 16;1-2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매달 첫날에 수입에 따라 준비하여--
고후 11:8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9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빌립보 4;16 너희가 한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히브리서 7;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0;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등, 감사와 헌금을 연결시켜 기록하지 않았다.
감사는 감사로써
헌금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공동체의 일원인 성도가 하나님께 행하는 향기로운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감사가 돈으로 환산되어지는 순간 그 행위는 무당의 복채와 비교해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감히 돈으로 흥정하여 사고자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임에 틀림없다.
“하나님 이 돈을 바칠테니까 이렇고 저렇게 해 주세요!”
“하나님 이렇고 저런 일을 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이 헌금을 바칩니다” 라는
값 싼 행위가 아닌-,
기도드리는 응답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머리털까지 세신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에 무한히 감사드리는 행위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가까이 가는 행위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고 적어 헌금의 표준 지침을 알려주었다.
맥추와 추수감사절을 비롯한 각종 절기의 특별한 경우에는
감사의 마음을 헌금에 담아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의 참여 회비를 내면서
“이 적은 것을 주께 바칩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쓰이게 하여 주시라”고
몸을 바치는 기도의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
한국 개신교와 기도. 그리고- 우리 교회 남의 교회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린지 100여년이 훌쩍 넘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구라파와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청교도가 건설한 미국이
기독교가 서서히 쇠퇴해가는 이즈음 유독 부흥일로를 질주하여 성장하여온 이 땅의 기독교의 발전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신앙의 선배들의 깊은 기도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겠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서양에는 없으나 우리 한국 교회에만 있는
새벽기도회와 기복주의 신앙의 역할이 컸었음을 지적하고 싶다.
초대교회 시절 행여 촛불의 빛이 새어나갈까 마음 졸이며 박해를 피해
새벽에 몰래 예배를 드렸을 이 땅의 신앙의 선배들을 유추해 본다.
한 편으로는 여태껏 정화수 떠놓고 이름 없는 신에 두 손 비비며 가족과 자신들을 위해 치성을 올렸던 정성을,
어느 순간 그 대상을 예수님으로 바꾸고 그러한 마음으로 복을 빌었을 우리조상들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새벽기도회의 당위성을,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편57:8)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편46: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이른 아침 예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가1:35) 등의 행적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는 앞장에서 언급한 “십일조의 생활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듯
“새벽기도 역시 필수가 아닌 선택”인 것이다.
물론 비상한 시기와 비상의 때에 특별한 시간인 새벽을 택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습관은 절실하다 하겠으나 일상의 새벽기도회는 오히려 성경적이지 않고 오히려 바리새 적이라 생각된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 기도의 모범을 말씀해 주셨다.
“너희는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새벽집회의 기도는 집회 자체가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는 교회당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향하여 “자기 상을 이미 받았노라”(마태6:5)고 말씀하셨다.
또한 “골방에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마태6:6) 하신다.
은밀한 곳에 계신 아버지께서 다 들으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12제자의 한 사람인 나다나엘(=바돌로메)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은밀히 기도하는 것도 알고 계셨다.
이어서 중언부언하지 말라(마태6:7)하신다.
우리는 새벽기도회에서 1시간 2시간을 기도하시는 신앙의 선배들을 많이 본다.
나는 그 분들의 간구와 하나님과의 대화가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지는지가 몹시 궁금하다.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신 중언부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도 궁금하다.
아까 구한 것을 다시 구하지 말라 시는 지
어제 구한 것을 또 다시 구하지 말라 시는 것인지
아니면 한 달 전에 구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다시 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지---
흔히들 우리는 기도의 결정체를 설명할 때
“야곱의 천사와의 씨름”을 예로 들곤 한다.(창세기32:24-30)
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고 그 씨름은 기도라는 것이다.
야곱이 씨름하여 얻은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었다.
그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교활한 자 속이는 자의 뜻인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는 혹시 당시로부터 2000 여년 후 예수님 때까지와 다시금 현재까지의 2000년 후 까지,
예수님을 아직도 메시아로 용납하지 않는 이스라엘일지라도 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선포한 역사이었지 않나 생각된다.
이는 아담이 첫 인류의 조상이고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바꿀 수는 없는 것처럼 결코 바꿔지지 않는 진리의 사실이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선민 이스라엘이 대한민국이 되고 대한민국이 이스라엘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사람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야곱의 씨름-그것은 기도의 문제가 아니고 교활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문제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시금 기도의 모범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고 또 강조하여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으니(마태10:30)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맏기라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적었다.“(살전5:17)
우리는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가르친다.
바로 여기에서 기도의 표준이 설정된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자신을 망각하고 일에 몰두할 때 갑작스러운 상황이 찾아오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주여”하고 부르짖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가 기도를 품고 사는-,
눈을 감고 무릎 꿇는 자세를 애써 취할 틈 없이
기도하는 습관이 몸에 배 있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닐까?
쉴 새 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주님과의 동행이야말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이 될 것이다.
전도
내가 나가는 교회의 한 가정이 같은 노회 소속의 이웃 교회로 옮겨 출석하는 일이 생겼다.
이 일로 담임목사님이 많이 낙심하여 전화로 이웃 목사님께 항의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이런 일들은 우리들 주변에 너무도 많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목회자 간에 화를 내고 항의해야 하는 사안일까?
사람들은 전도할 때 보통 “우리 교회에 나오시라“고 전도한다.
나오시면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께 복 받고,
그래서 사업이나 직장일이 잘 풀릴 수 있다고 열심히 말한다.
그리고는 전도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건 전도가 아니다. 유인이다.
전도란 문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이다.(傳導;전할 전, 길 도)
예수가 우리의 구주되심을 알리는 일인 것이다.
세상의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알리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라는 말씀이다.
상대가 믿고 안 믿고,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단지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자라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는 일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런데 기껏 전도했던 그 사람이 다른 교회를 출석한다면-
그럴 때 성도들은 “꼭 우리 교회로 나와야 한다”며
대단히 분개하여 심하게 상처 받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기도원에 관한 문제도 비슷한 맥락이다.
꼭 그 기도원에 가야만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응답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비단 기도원에 관한 것만도 아니다.
반드시 교회의 기도실에 나가서 기도해야 주께서 들으실 것이라 생각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산물인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장로교 헌법 1편 교리편, 21장 예배와 안식일의 6항에는,
“기도나 예배의 무슨 부분이 복음의 시대에 있는 현재
예배드리는 그 장소가 고정되어 있거나
또는 장소나 그 대상에 따라서 그 예배가 더 훌륭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각 가정에서 매일 드리든지, 혼자서 은밀한 곳에서 드리든지
또는 공동적으로는 더 엄숙하게 드려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미 개신교의 초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교회와 기도 등 예배에 관한 모범이 제시되어 있었는데
우리들은 애써 다른 길을 찾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