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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이단

정의파파 2024. 7. 4. 09:48

   가톨릭과 이단
  어렸을 적-, 아버지 따라 산소 가는 일은 명절이면 치루는 필수행사였다.
아버지는 믿지 않는 분으로 조상의 묘를 찾고 절하는 것을

효도의 근본으로 삼는 분이셨다.
믿지 않는 가정의 어린 주일학생으로 묘 앞에 서는

그 상황을 경험해본 분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조상의 묘 앞에 엉거주춤 서 있었던 난처한 상황이 지금도 생각나곤 한다.
장레식장에서 장례를 치루는 요즘

영정 앞에 절하는 대중 옆에는 따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 개신교인들이 “묘“나 영정 앞에 절하지 않는 것은 십계명의 제2계명에 기인.
제2계명에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그것에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 셨다.
여기서 “절“은 영어 성경에 ”bow down“으로
      “경배“는 worship”으로 표현 되어 있다.
만든 형체에 경배하고 숭배해도 아니 되지만

고개 숙여 인사해도 아니 된다는 말씀이다.

바로 이 점 “절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절을 해도 되는 것”의 차이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율법준수와 탈 율법주의적 신학적 판단을 유추할 수 있다

우리는 장례식장이나 산소에서 스스럼 없이 절하는 가톨릭 이웃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점에 있어 가톨릭은 탈 율법주의이며 개혁적이다

개신교는 아직 율법에  얽메어 있고 가톨릭은 그것에 자유스럽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을 이단이라 단정한다.
첫 번째의 지적이 성모님의 상 앞에서 절하고 성호를 그리는 것!
이는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또한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성경에 성모 마리아에 관한 신성의 기록은 없다.
다만 그분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셨던 분이시기에 지극히 존경받아 틀림없다.
그러나 존경을 벗어나  신으로 경배의 대상이 된다면 이는 분명 우상숭배이다.
절(bow down)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경배(worship)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존경하는 것과 경배하는 것은 다르다.
신세대가 열광하는 idol group은 젊은이들의 좋아하는 대상이고
이순신장군과 노무현대통령 등 그리고 숱한 위인 성자들이 존경의 대상이라면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한 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한 분 뿐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서를 통하여 율법의 불완전함을 선언하셨고,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 질책하셨고,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 까지요 (누가16;16)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온 것이라(요한1;17)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요한5;46)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한10:8)“
     율법을 “너희 것”으로 예수님의 말씀과는 거리를 두시며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요한10:34)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8;32)고

       율법을 뛰어넘는 진짜를-진리를 알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율법이그리스도의 도에 비하여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고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며 --- 불리하게 하는 율법이 폐기됐다고 기록케 하셨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로마7:4)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로마 76)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 이니라(고후3;6)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 (고후3:14)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에베소2;15)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로새 2;14)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골로새서 2:20)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히브리서 6;1)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브리7;18)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야고보서1;25)“

 

사도요한을 통하여는
   "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말씀이거니와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 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한일서4;7)" 라 적고 ,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고 주신 온전한 새계명을 우리에게 깨우치셨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며 제하여 버리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골로새 2;14) 주신 새계명은, 너무도 자유롭고 광대하다.
   

주께서는

“내가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하셨다.

   그 율법을 넘어서야 비로소 길과 생명되신 예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묘 앞에서의 절은,

절을 하고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지 아닌지의 문제이다.
우리 개신교가 주장하는 묘나 영정 앞 등 기타 다른 모양 앞에서의 절 문제는,

율법을 과잉 혹은 잘못 이해한 결과의 산물로 수정되어야 할 판단임에 틀림없다.

덧붙이면, 제사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의 문제도 그 답이 너무 명쾌하다.
절하고 제물을 먹는 현장에, 믿은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 형제들이 있어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이면라 삼가야겠지만,

보는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고

먹는 사람이 스스럼 없다면 아무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고전8장-우상의 제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골로새 2;16)”

 

베드로와 교황
    마르틴 루터의 95개 반박문중 27번째 조항-,
“그들은 돈이 상자에 짤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는 구절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개신교에서 종교개혁 주일이면 각 교회마다 강단에서 매번 인용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사실 루터의 95개 반박문은 헌금과 연관된 구원의 문제 보다,

교황과 사제의 권한과 죄 사함에 관한 반박 내용이 대부분이다.
95개 반박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황에게는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각 개인의 성경에 기초한 믿음과 철저한 회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내용 이었다.

루터 이후 칼뱅을 포함한 종교개혁가들이 공통으로 주장한 내용은 바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a Deo Gloria) 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루터가 놓친 것이 있다.
95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시의 신학교 교회인

만성교회(Church of all saints) 출입문 게시판에 붙일 때만해도

루터는 교황청 산하의 수사였으니 만큼

감히 교황에 관한 근본적 권위모독에 관한 심한 발언은 상상할 수도 없을 터-.
반박문 26번째 조항을 보면
“교황이 열쇠의 권세에 의해서가 아니라도

대도(代禱;suffrage)에 의해 영혼의 형벌을 면제하는 것은 옳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대도(代禱;suffrage)하는 문제는 접어두고라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부여하였던 열쇠의 권세에 관하여 모호한 논거를 편 것이다.
예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베드로가 고백하였을 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16:19)고 말씀하셨다.

 

                 (베드로 수위권교회 빌립보 가이샤라)-본 블로그 이스라엘 욥바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선민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 선민들은 예수님을 인정치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고넬료라는 이탈리아 백부장을 전도하여 이방선교의 시작을 알린다.(행전10장)

                                                     피장시몬의 집. 옥상

                베드로가 지붕에 올라 기도하던중 네 발 가진 불결한 짐승의 환상을 본 곳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시니라"(행전10:15)

이방인 우리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깨끗케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히 너희들이 함부로 속되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은총으로 드디어

이방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이었다!

피장 시몬의 집 뒤쪽의 선착장-

예수님 당시 부터 600여년 전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피해 머물렀던 곳-
베드로가 요나의 아들임에 비추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바요나 시몬=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

뒤로 보이는 지중해를 지나 로마와 스페인-, 

가까운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땅끝까지 선교의 문은 열렸다!

 

베드로가 연 전도의 문은 뒤이어 사도 바울의 거침없는 전도여행을 이끌었고

예수님의 베드로를 통한 복음의 말씀이-,

받지 않는 이스라엘을 젖히고 이방 백성들에게 전파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바로 천국의 열쇠를 쥔 사도 베드로가

열쇠로 문을 열어 닫을 자가 없게 한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그 뒤를 이은 후대 교황들을 천국 열쇠를 쥔 후임자들로 인정한다.

 ----열쇠를 권위와 권한으로 해석 하는 듯.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지

그를 이은 어떤 사람께도 “열쇠를 계승하라” 언급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 승천 후 2000여 년간의 역사에 영향주었던 교황의 직책과 직무는 인정해도

선민 이스라엘의 벽을 뛰어 넘어 전 세계 이방에 천국의 문을 활짝 연 

베드로를 계승하는 열쇠의 권세(the power of the keys)는 인정할 수 없다.
바로 이 부분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 짓는

 이단(異端:바름이 다름-옳바르지  않다는 뜻과는 다르다)의 단초의 하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