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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새계명

정의파파 2024. 7. 4. 09:24

예수께서 율법을 온전케하시려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616절에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 까지요 그 후 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리라 하셨고,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

이 새 계명 사랑은 구약의 계명을 부정하고 느닷없이 나타낸 계명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주일학교 적부터 배워온 바에 의하면

십계명의 내용은 크게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으로 구분 되어 진다고 했다.

십계명의 내용은 한 마디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태곳적부터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자 했던 핵심 진리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흔히 "사랑장"이라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사랑에 대한 주옥같은 말씀을 설파하다 갑자기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일을 버렸노라"고 

       뚱딴지 같은 전혀 앞 구절과는 다른 말씀을 한다

그 뜻은 고린도교인들이 어린 아이처럼 사랑없이 서로 다투는 일을 빗대어서 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율법적 사고를 어린 생각으로" 새로운 계명 (사랑)을 장성한사람 다시 태어난 거듭남의 결과로 지적한 것이었다.

뒤어어 12절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서로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하고

마지막 13절에 "믿음 소망 사랑 사랑 중 사랑이 제일이라고 선언하여 

부분적이고 온전하지 못한 옛 계명 대신 우리에게 주께서 주신 완전한 새 계명-

"사랑"을 설파했다.

 

율법의 극한 금기를 걷어 내는 성소의 휘장 사건(누가23: 45),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한10: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마태11:28-30)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하신”(마태 5;17) 말씀과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5:18)

는 예수님의 수차에 걸친 걍조의 말씀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속박하는 율법을 뛰어넘어 

오히려 율법의 내용을 포함하면서도 자유롭고 가벼운 짐- “새로운 계명”-즉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불완전한 율법을 완성하여 주신다는 말씀이었다

 

사도 요한은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말씀이거니와”(요한일서1:7)라 하면서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요한2 1:5)고 적었다

사랑의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는 법률을 만드시지 않았다.

새 진리의 계명은 사랑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태초 이래로 있어 왔고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하는 사람은 즉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으며,(요한8:32)

이 사랑을 몸소 실천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믿으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됐다.(요한3:16).

사도바울이 로마서109절에 기록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 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여태껏 지켜왔던 유대인의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입으로 고백시키는 당시의 전도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일 것이다.

 

주일성수에 관한 잘못된 해석

     우리나라 1960년대 보리가 익어가는 5,6월 농촌 들녘에서는

들판을 걷다 심심하면 보리 이삭을 불에 태워 손바닥으로 꺼풀을 불어낸 다음

한 웅큼 입안에 털어 넣고 먹었던 일들이 흔히 있었다.  일명, 보리타작!

 

예수께서 밀밭을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는데(마태12)

이 행전(行典)은, 가난한 과부나 나그네 등을 생각하여 밭 전체 중 일부를 남기고 수확 하거나 떨어진 밀 이삭을 그대로 두었던 이스라엘의 관대한 풍습으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을 밀서리가 (레위기23:22)(룻기2)

제자들에 의하여 하필 안식일에 행해졌던게 바리세파 사람들에 포착되어 예수님을 책잡는 꼬투리가 되었다.

    출애굽기에는 누구든지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이라 되어 있고(35:2)

민수기에는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을 온 회중이 돌로 치라 기록되어 있다.(1532)

이밖에 구약성경에는-,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이사야 56:2)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며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이사야 58: 13)

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나타내신 안식일에 관한 말씀이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적은 그들의 사고와 너무 다르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마태12:9-21)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고,(누가13;14)

안식일에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셨다(누가14;1)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나(요한9;16)라 지적하고 비판을 일삼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세파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을리 없다.

성경에는,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요한5;16)고 기록되어 있다.

 

    율법을 완성시키려 오신 예수께서는 잘못된 그들의 율법해석을 바로 잡고자 하셨다.

자신이 스스로 주신 율법이었기에 인간들이 올바르게 깨닳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누가6:5)               

주인의 소유물인 안식일이 지켜지든 폐해지든 그것은 주인의 뜻에 달려 있다.

에스겔2012절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안식일을 우리에게 주신 뜻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분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주일날 우리가 예배를 드리든, 선을 베풀든, 먹든지 마시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거룩한 하나님에 비추어 더럽혀진 우리를 스스로 되돌아 보라는 의미로 안식일을 주셨단 말씀이다.

이렇듯 당당한 예수님의 행동은 스스로가 안식일의 주인이어서 가능했다

이 주인의식에 관한 말씀은 마태복음 9장에도 나온다.

바리세인과 금식논쟁을 할 때 혼인집에 손님들이 신랑(주인)과 함께 있을 때에는 먹고 마시고 등 주인을 기뻐하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하신다.

 

    우리 한국교회는 안식일의 초점이 일요일 이라는 요일 자체에 맞춰져 있다.

그리하여 현지의 유대인들에게서 조차 대부분  지켜지지 않는,

  (현대의 일부 유대인들은 금요일 오후 부터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요일 자체도 논란이 많은 일요일을 거룩한 날이라하여,

(예수님 당시에도 토요일 이었던 안식일을, 개신교는 A.D.300여년부터 콘스탄티누스의 명에 따라 

예수께서 부활한 일요일을 주의 날로 정해 지켜오고 있다.)

그날은 거룩한 날이니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 날을 잘 지켜서 복 받은 사람들을 열거하고 지키지 않아서 화 받은 사람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본인이 본을 보여서 안식일의 참 뜻을 알려 주셨고

또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16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고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골로새서2:20)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따르느냐”(22)고 가르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을 폐하러가 아니고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기억하게 된다.

진리를 제대로 알아야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하신다."

 안식일에 하는 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하여 지킨다면 안식일을 범하는 죄의식에서 자유로워 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