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12제자와 순교 장소,그리고 무덤이 있는곳을 정리해본다.
2000여년 전의 흔적이니 만큼 불확실하거나 전승된 사실들이 대부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순례의 성지를 모아보는 작업에 의의를 둔다.
주로 다음백과,위키백과,성서교재간행사 발행 Grand주석을 참고 했다
0,베드로
영어 이름은 Peter,원래 이름은 시몬

갈릴리의 벳세다 에서 출생
A.D.64년에 순교
부친: 요한(혹은 요나라고도 불림),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안드레의 형
주로 안디옥과 소아시아에서 선교했고
로마에서 네로황제에 의해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외경;베드로행전)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탈출하던중 예수님을 만나
베드로; "주여 어디로가시나이까" (쿠오바디스 도미네!)
예수께서-" 너 대신 다시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간다" 했을 때
베드로가 돌이켜 로마로 돌아가
거꾸로 십자가 형틀에 자원해 메달렸다는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1950년 비오 12세가 바티칸에서 베드로의 무덤이 발견됐다고
라디오에 발표하자 바티칸에 순례자들이 몰려들기 시작.
1966년 인류학자 마르게리타 과르두치가
바티칸의 베드로 유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자
교황 바오로 6세는 확실하다고 선언
1999년 바티칸 지하무덤 발굴을 본격 시작했지만 베드로의 유해를 확인 못함.
2013년 바티칸 베드로 성당에서 베드로의 유해를 일반에 처음 공개
베드로 대 성당 -지하에 베드로의 유해가 묻혀 있다 한다.
0,안드레;
그리스(당시 아가야) 언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용기있는", "사내다움"의 뜻
베드로와 형제,
벳세다에서 출생하였고 빌립,세베데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등과 함께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처음 세례요한의 제자였으나 (요한1:39) 예수님을 따르던중 제자로 피택
형인 베드로를 예수께로 인도 하였다.(요한1;42)
흑해를 중심으로 선교활동-러시아에 처음 복음을 전한자로 알려 젔다.
A.D.70년경 아가야(그리스)의 파트라스에서 체포되어
총독에 의해 X자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한다.
그리스 파트라스에는 아기오스 안드레아스 기념교회가 있다.(그리스정교회)
파트라스는, 리온 안티리온 브리지에 의해 이오니아해를 가로 질러
그리스 본토의 "이그리니오"와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 여리고에는 삭개오의 집이었던 곳에
안드레 기념교회가 있고(곱틱교회)
외경인 안드레행전에는,안드레가 그리스 북부 Epirus등에서 선교한 행적과
후계자로 스타키스 주교를 임명한 사실이 나온다.
"X"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의 첫자여서 스스로 X자 십자가형을 택했음.
형장에서 안드레는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해 주께서 지금 나를 부르신다.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곁으로 나를 인도해다오!"라고 찬송하며
숨이 붙어 있는 이틀동안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이 집행관에게 자비를 요청-
안드레가 십자가에서 내려온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그를 비추었고 잠시후 안드레는 숨을 거두었다 한다.
유해는 잠시 동안 코스나티노폴리스에 머물러 있다
357년 콘스탄티누스 2세가 파트라스로 유해를 옮기고
1208년 이탈리아 아말피의 성 안드레 성당으로,
15세기경 두개골이 로마의 베드로대성당에 옮겨졌고
일부 유골이 유럽으로 반출.
스코틀랜드로 옮기던 중 바다에서 배가 좌초- 그 바다가 안드레만이다.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의 하얀색 "X"자는 안드레를 상징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리스정교와의 화해를 위해
유해를 다시 파트라스로 옮겼다.
0,야고보; 12제자였던 사도 요한의 형
아버지 세베대와 어머니 살로메
성격이 베드로 보다 급해 예수께서 보아너게(우뢰의 아들=son of thunder;;천둥)
라는 별명을 주심(막:3:17)
12제자 중 첫번째 순교자(행 12:2)-헤롯왕에 의해 칼로 죽임 당함
마가의 다락방 바로 옆 작은 홀에 있는 다윗왕의 무덤--.
다윗을 사모하는 후인들이 기념으로 만든 가상의 무덤.
마가의 다락방에 "야고보의 무덤교회가 있다는데
1998년 방문 당시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고
"야고보 무덤교회"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무덤과 (강단 아래),
강단 좌측에 제자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
다락방이 있는 아르메니아 지구는 예루살렘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 국가임을 선포했고
그 열기가 예루살렘 순례로 이어져 예루살렘에 아르메니아 지구를 형성.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이루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나 아랍등 어느 쪽에 정치적으로 소속되어 있지 않다.)
야고보의 순교에 관하여,
A.D. 44년 헤롯에 의해 순교 당한후 예루살렘에 안장했다는 불명확한 설
생전에 이베리아 반도(스페인)에 까지 복음을 전했다는 전승이 있다.
9세기초,스페인의 한 동굴, 하늘에서 빛이 비추는곳에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 한다.
844년 스페인 라미로 1세때 클라비호 전투의 선두에 야고보가 백마를 타고 현신해
이슬람군(무어인)을 무찌르는 기적이 나타났다.
그 후 야고보의 유해는 스페인 갈라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장되었고
다시 국왕 알폰소의 명에 의해 교회가 무덤 위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150년 후 현재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이 완공.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
산티아고(=성 야고보); 성 디에고의 스페인식 표기
콤포스텔라; 별이 빛나는 들판이라는 뜻
야고보의 현신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순례하는 성도들이 늘어나
지금은 유명한 세계적 순례길의 하나가 되었다.
순례길에 얽힌 간증들도 많은데 그 중 하나는,
마약 중독으로 정신병원 입원 병력이 있던 작가"파올로 코엘라"는
이 길을 순례 후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 한다.
0,요한; 야고보의 동생
별명; 보아너게
12제자중 순교하지 않고 수명을 다한(100세) 유일한 제자
전승에 의하면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순교했다는 설이 있으나
야고보가 죽은 사실의 성경 내용에 볼 때 불명확 하다
터키의 이즈미르 셀주크의 아야슬룩 언덕에 있는 요한의 무덤-
네개의 기둥이 무덤의 경계 .
에페수스에 기거한 요한이 100세 가까이 장수하고 땅에 묻힌 후
요한복음 21장21-23절의 적절하지 못한 베드로의 질문은
"요한의 가슴에 뿌려진 흙이 조금씩 움직인다"는 등의 와전된 소문이
300년 후인 어거스틴의 시대 까지도 어어져 내려왔다
요한의 기념교회 정문
요한이 박해 받았던 이 언덕에서 모은 돌들로 세운 문-, "박해의 문"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쓰고 이 곳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후 그가 장사된 무덤에 세운 기념교회
인구 400만의 항구도시 이즈미르-,
일리어드 오딧세이를 쓴 호머(Homer)의 고향이며
아시아의 꽃,보석,영광,면류관으로 불리웠던곳!!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테세우스가
그의 아내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이곳을 "서머나"로 불렀다 한다
에페수스에서 박해자들은 요한을 끓는 기름에 넣었으나 튀어나와
놀라 밧모섬에 귀향보냈다 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승천후 어머니 마리아를 뒷바라지하며(요한; 19:26-27)
이 근교를 전전하며 살았던것 같다.
교회 앞은 작은 마을에-,기념품 가게들이 몇 있다.
옛날에는 이 앞까지 에게해의 바닷물이 들어 왔었다 한다.
초기 기독교 부터 순례자들의 필수 코스.
4세기경, 무덤이 있던 자리에 교회가 세워졌고
6세기경, 비잔틴의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대대적으로 증축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이 언덕에 움막을 짓고 은둔하면서 요한계시록을 저술했다 한다.
무덤, 세례장소,곡물창고등 당대의 건축물이 있다.
근교에 있는-,마리아 기념교회-성모 마리아가 여생을 보낸 곳에 세운----
0,빌립; 갈릴리 벳세다 출신
처음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
바돌로메라고 불리는 나다나엘을 예수께 인도했다.
A.D. 80년경 소아시아와 시리아지역에서 선교하다
히에라폴리스 (거룩한 도시라는 뜻) 에서 십가가에 달려 순교
(온천지로 유명한 터키의 파묵칼레)
초기 기독교 시대에 세인트 빌립교회에 안장되었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의 요청으로)
비잔틴시대인 5세기경
Martyrium(마르티리움)교회에서 50m떨어진 곳에 빌립의 유해를 이장 추정
이후, 터키의 Martirs Hill (마르틸스 언덕)에
빌립의 유해가 있을 것으로 전승으로 내려오던 중,
최근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 데 안드리아가
교회를 정비하다 5세기로 추측되는 빌립의 무덤을 발견했다 한다.
빌립의 무덤 - blog.daum.net/kwak2352/239 에서 가져옴
0,바돌로메=나다나엘,
(-예수께서 "무화가 나무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는---)"
"바" 돌로메는 돌로메의 아들이라는 뜻,
ex ;" 바" 요나 시몬아!= 요나의 아들 시몬아!
전승에 의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신후 바돌로메는
소아시아 자방인 프리기아와 리카오니아 등지를 거쳐
현 아르메니아의 알팍지방에서 선교하던 중
이교사제들의 선동을 받은 아스티아제스 왕에 의해,
살가죽이 벗겨진후,십자가에 못 박히고
붙어있는 숨을 머리가 잘려짐으로 거두었다 한다.
그의 유해는 알바노에 매장된 후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다리 지방으로 옮겨졌고
*알바노; 마케도니아 속주의 이피로스에 위치하였던 일리리아인의 도시.
알바노폴리스의 현 위치는 알바니아의 크루여 근처 즈거르데쉬 마을로 추정.
6세기에, 시칠리아 근처 리파리섬에 이송되었다.
839년, 사라센의 침략으로 훼손을 염려해 베네벤토에,
983년, 다시 로마로 이송,
현재는 로마 테베레강의 티베르섬에 건축한
"성 바돌로메 성당"에 그 유해가 보관되어 있다 한다.
☆성 바돌로메 성당; 10세기에 설립된 대성당으로
카라치와 메르카티의 프레스코화와 순교자 기념비가 있다.
0,도마; 쌍둥이라는 뜻, 별명-디두모
의심많은 제자의 대명사, 갈릴리 출신으로 직업은 목수였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할 정도로 열정적인자,
신약을 통틀어 유일하게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자
도마에관한 행적은 주로 외경과 전승에 의한것이 대부분인것 같다.
초대 교회 확장기에 Parthia지역(현재의 아르메니아,이란 북부)에서 선교
Parthia (Ashkanian)제국은 현 아르메니아,이라크,조지아,튀르키에동부,
시리아 동부, 쿠웨이트,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걸프만 해안지역등 광범위한 영토를 정복했었다.
4세기경부터 인도의 교회공동체는 페르시아 주교권에 속하게 됐다.
인도 말라바르 전승에 의하면,
A.D. 52년경 크랜가노르에 상륙한 도마가 이웃도시들의 신분이 상위 카스트인
힌두 가족들을 개종시키고 코로만델 해안을 거쳐 중국에 까지 선교하다 돌아와,
(※이 즈음에 우리나라 까지 도마가 왔던 증거와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시는 목사님이 계신다)
전에 개종한 가족과 지도자들로 구성된 말라바르 기독교(Christians df Malabar)를
조직하고 교회를 세운 후 코르만델 으로 가던중 현재의 성 도마산에서 순교하여
시신은 밀라뽀르로 옮겨져 생전에 그가 건축한 사원에 장사되었다 하고,
인도 중서부해안 포루투갈인 들이 선점했던(말리바르) "고아" 지역에는,
사도 도마를 기념하는 전통 도마 교회가 "첸나이(마드라스) 도마 산"에 있는데
이들을 "라스라니(=나사렛 예수를 믿는 자)"라 부른다
밀라뽀르(포르투갈 어)전승에 의하면,
성도마 언덕(St. Thomas Mount,파랑기 말라이;타밀어)의
그가 건축한 사원에서 돌 십자가를 걸고 있는 도마를 창으로 죽였고,
제자들이 시신을 산 토메 밀라뽀르 해변에 장사했다 한다.
그 근거로 언덕 동굴의 손자욱,돌십자가,
"밀라뽀르 산 토메 성당"의 도마의 무덤을 증거로 제시한다.
인도 남동부 해안, 타밀나두주 첸나이에 있는 이 유적들은
19세기 말부터 로마 카톨릭의 관리하에 있다.
첸나이는 1996년 이전 까지 마드라스로 불리었다.
외경인, 도마행전(Acts of Thomas:3세기 에뎃사의 시리아어로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도마더러 (힌두교등 우상숭배가 심한)" 인도로 가라" 하셨는데
도마는 가지않았고
예수님 승천후 도마는 다시 목수로 일하게 됐는데,
인도 왕의 명으로 궁전 건축사를 찾으러 예루살렘에 온 인도 사신이,
노비시장에서 은 30에 도마를 사서 궁전 건축 책임자를 맡겼다.
책임을 맡은 도마는 궁전은 짖지 않고 그 돈을
"왕이 주시는 돈"이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줬다.
왕이 더 하여 "황금돔을 지으라고 준 돈도 그렇게 했다.
왕이 어느날 그 간의 공사 진척 현황을 묻자 도마는
"당신이 죽는 날 그것을 볼것"이라 했다.
격노한 왕이 도마를 하옥했는데,
때마침 왕의 친 동생이 급사하여 천국에서 화려한 궁전을 보게 됐다.
동생이 천사에게 그 궁전이 누구것인가 묻자 천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의 형을 위해 지은것"이라 설명 했다.
천사에 청하여 다시 살아난 동생은 형에게 자신이 본 것을 예기했다.
왕이 도마의 사형을 면하고 개종하여 세례를 받자
많은 백성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인도에서 순교 후 장사된 그의 유해는
에뎃사(메소포타미아:현 시리아 북쪽 투쪽르키에의 동남부)에 옮겨졌다
(이기록은 파르티아 제국의 군다포러스왕 때 사도 도마의 행적)
4세기경, 인도 공동체가 페르시아(동시리아 전통을 계승한 에뎃사교회) 전통을 계승
1291년 요한 선교사(몬테코르비노 출신), 성 도마지역을 확인
1321년 오도릭 수사(포르데노네 출신),
마드라스(인도,첸나이) 인근 "성도마성당"을 방문
이 곳에 사도 도마가 묻혀 있다고 보고
1347년 조반니 데 마리놀리-사도 도마가 안장된 성당을 순례
1560년 로마의 예수회는 고아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도마교회를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하는 이단자라 단정하고 탄압.
벤자민 G. 윌킨스는 그의 저술 "기독교회사"에
머리에 검은 두건이 씌워진채 물바퀴,선반,화형틀등에 의해
심한 고문을 당하는 성도들과 그에대한 참회섞인 글을 서술했다.
현 역사가들은 네스토리우스 이단자라는 판정에 동의하지 않고,
선교사가 오기전 형성된 동시리아 전통 가톨릭공동체라 본다.
0,마태; 여호와의 선물 이라는 뜻
에티오피아에서 왕에게 불편을 끼쳐 칼로 목베어 순교당한것으로만 전해지고
그의 무덤에 관한 기록은 아직 찾을 수 없다.
여러 정황상 순교당한 현장 에티오피아의 어떤 곳에 그의 무덤이 있지않을까?
유대의 탈무드에는-,
마태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후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산헤드린공의회가 열린곳이 에티오피아는 아닐것?-이고,
예루살렘이라면 세리를 미워하고 이단이라 핍박했던 유대인들이
마태의 시신을 곱게 안치할 이유가 없었을것!
유대땅 어쩌면 예루살렘 어느 험한 땅에 버려졌을 지도 모른다.
별명; 레위(마가2:14)
전직; 세리(세무서원)
아버지; 알패오(또 다른 제자인,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 와는 다른 인물)
예수님 승천후 30년에 마태복음을 기술
성품이 겸손하였음을-,
자신을 가리켜 "나의 집" 이라하지 않고"그의 집,
"마태라 하는 사람의 집 등으로 표현한것을 미루어 짐작 한다(마태9:9-10) .
0,야고보(알패오의 아들);
별명; 작은 야고보
직업; 불명
순교장소; 애굽으로 추정(그랜드 주석;성서교제간행사 1993년)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바리세파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끌고가
밀어 뜨린후 돌로 쳐서 죽였다 한다(위키백과).
아버지; 알패오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 관계)-
성경에는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를-, 예수님의 형제(마태13:55),(갈:1:19)로 기록
야고보서를 저술
개신교와 동방정교에서는,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는 다른 야고보로 생각하는데 반해
로마 카톨릭에서는, 예수님의 친 동생 야고보와 같은 인물로 생각한다.
성경의 기록이 미약하여 전승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경건한 신앙생활로 술과 고기를 금하고
외모에는 관심없어 긴 망토와 맨발로 살았고,
율법을 준수하여 오랜 기도생활로 무릎이 낙타의 그것과 같이 되었다 한다.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과 가깝게 생활했고,
예수님의 승천 후에는 최초의 예루살렘 주교로 봉사 했다.(행12:17, 21:17-18)
0,다대오;
유다 다대오-유다는 존경받는 이란 뜻,다대오는 마음이 넓다는 뜻
작은 야고보와 형제
아버지; 알패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다대오"로,
누가복음(6:16 )과 사도행전(1:13)에는 유다로 기록하고 있다.
A.D. 62년에 페르시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
이란 북쪽, 서부 아제르바이잔 마쿠의 차드란에서 7Km 거리의 산,
다대오 기념교회 지하에 다대오의 무덤이 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중병에 걸린 아르메니아왕 업커르가 예수님을 청했다.
예수께서는 다대오를 당시 수도인 알씨어로 보냈다.
다대오가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자 왕과 국민들도 세례를 받았다.
A.D. 45년, 다대오와 바돌로메가 아르메니아를 방문했다.
그 기간중 업커르 사후 누이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처음에는 세례를 받고 개종한 왕이 나중 배교하면서 선교 중지를 명했다.
A.D.66년, 말을 듣지 않는 다대오와 성도들을 써너다룩(Sanaturk)왕은
무참히 처형하고 그 자리에 묻었다.
그장소에 세운 교회가 다대오교회 (현지명-쿠라켈리;Cara Kelissa).
성령 강림후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몬과 함께 복음을 전했고
페르시아에서 선교중 우상을 파괴하자 그 상에서 악마가 튀어나왔다.
신상 파괴에 분노한 사람들이 두 사람을 살해 했는데 경과의 전승은 없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활에 맞아 순교했다는 설도 있다.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산이 70KM 거리에 위치한
다대오교회(현지명-쿠라켈리;Cara Kelissa)는 A.D. 66년에 건축됐는데
현지인들은 시몬과 3,500여명의 성도들이 함께 매장되었다고 믿고 있다.
1981년 이슬람공화국 설립 이후에도 일년에 한번 기독교인에 대한 방문이 허락되어
해마다 7월 25일 부터 28일 까지
전 세계 아르메니아인 10,000여명이 순례차 이곳을 방문해
야영하며 예배를 드린다.(아르메니아정교)
서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시아파 이슬람의 본거지이지만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잘 내려온 귀한 곳.
일년의 한차례 예배이지만 초대교회 예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날이 이르매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그리고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설교를 자기들의 언어로 듣고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대인은 현재의 호러썬(이란 북부),
메대인은 현재의 코르테스턴(이란 서부),
엘람인은 현재의 후제스턴(이란 북서부),
이들은 다대오등 사도들의 선교의 열매들이라 할 수 있겠다.
0,시몬
응답함,들으심의 뜻
고향; 가나안 (마태10:4)
아버지; 알패오(소야고보와 형제)
어머니; 클레오파스 마리아
바리세인들로 구성된 극열한 민족주의 열심당원의 한 사람 이였다.
열심당원들은 한편으론 메시아를 고대하면서
또 한편으로 로마에 동조하는 동족들에게 약탈과 살인을 저질렀다.
예수님을 찬성하는 당원과 반대하는 당원이 충돌하는 가운데
시몬은 예수님을 택했다.
전승에 의하면,
다대오와 함께 페르시아지역에 선교할때
그곳 신상을 부쉈는데 신상에서 악마가 튀어 나왔다 한다.
흥분한 이교도들이 다대오를 죽이고
시몬은 거꾸로 매단채 사타구니에서 머리까지 톱으로 몸을 잘라 죽였다고 한다.
0,맛디아; 주님의 선물이라는 뜻
처음부터 예수님을 섬긴자. 72인 선교자중 하나
예수님 승천후 가롯유다 대신 피택되어
유대에서 활동후 오늘날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선교.
카스피해 지역 특히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전도했고
콜키스에서 십자가형벌 혹은 사지절단후 운명했다는 설과,
악숨(현 에티오피아)에서 도끼에 찍혀 순교했다는 설이 있다.
그후 유골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헬레나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어 로마로 옮겨졌고
어떻게 옮겨졌는지는 몰라도 독일의 트리서 지방에 다시 옮겨졌다 하고
1127년 다시 발견된 유골을
베네딕토회 성마티아수도원 성당(로마?)에 안치했다 한다.
0,바울
히브리어 이름은 샤울, 그리스어 이름은 사울
현 터키의 길리기아(키리키아)의 중심도시인
다소(타르소스)에서 유대인의 집안에서 출생
전통에 따라 구약(율법,예언),율법해석(미드라시),수사학을 가말리엘에게서 수학
가말리엘을 고려해볼 때 바리세파와 가깝지 않았나 추측
터키에서 자랐기에 고대 그리스문학에도 정통-아테네 철학자들께 전도
20,000km에 달하는 전도여행중
구약성서를 근거로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이시며 메시아 인가를 증거하였다.
기독교인이 아닌 학자들 간에는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도 없었겠지만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것"이라 평가
A.D. 60년 3월 가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에 입성하여 마메티눔 감옥에 수감
62년 3월 석방
A.D. 67년 에베소에서 체포된후 로마로 압송.
후세 사람들이 Scala Coeli라고 명명한 지하감옥에 수감된다.
그곳에서 참수형을 당했는데 잘린 목이 세번 튀어 피가 분수처럼 솟아 났고
목이 튄 곳에서 세개의 샘(Tre Fontane)이 솟았다 한다.
참수할때 받쳤던 돌기둥과 목이 튀었던 세곳에 작은기둥을 세워
순교 장소를 기념 교회로 만든것이 현재의 Scala Coeli 교회
순교후 시신을 명문가문인 루치나 부인 소유지에 안장-현 오스티안 거리
Scala Coeli 교회--사도 바울이 순교한 장소에 세워진 교회
바울 대성당; 성 밖 바오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 바울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장소(루치나부인 소유지)에
바울 대성당을 건립 시작.
발렌티니아누스 1세때 확장 공사
386년 테오도시우스 1세때 증축
2005년 "안드레아 코르테르 란자 디 몬테제몰로" 이탈리아수석 사제가
대성당의 수석사제로 피택.(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지시)
2006년 12월 6일 고고학자들이 "바울 대성당 제대 아래에서
바울의 유해로 추정되는 석관을 발견했다"고 발표
학자들에 따르면 석관위에 두개의 석판이 있는데
그곳에 순교자,사도 바울( Paulo Apostolo Mart(yri)) 이라 새겨 있었다.
하지만 발굴 기록에는 적지 않았다 한다.
2002년 부터 2006년 까지 검토하였지만
석관을 열고 내부를 조사할것인지는 아직 미정 상태
현재는 무덤에 작은 유리창을 내고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는 있는데
석관 한쪽 끝 부분만의 공개에 그치고 있다.
※. 로마의 4대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산 조반니 인 라테나노 대성당 (Basilica di SanGiovanni in Laterano)
바울 대성당; 성 밖 바오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0,디모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자 라는 뜻,바울이 참 아들이라 칭한자(딤전 2:1)
A.D.17년 소아시아 남부 루스드라에서 출생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루이스가 유대인이었던 관계로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가정에서 자라났다.
사도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A.D.45-46년)때
바울이 디모데의 집에 유숙한 인연으로 세례를 받게 되고.
바울의 2차,3차전도 여행에동행.
바울이 체포되어 가이사라 감옥에 수감되자 홀로 에베소로 돌아와
에베소교회의 주교로 임명되어 훗날 사도 바울로 부터
2차례의 편지(디모데 전서와 후서)를 받게 된다.
사도 바울의 순교후 에베소에서 디아나여신에게 제사 드리는 군중에게
디아나는 우상이라 선포하자 격분한 군중에 의해 곤봉에 맞아 순교하였고,
후에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바울의 무덤 아래 묻었다고 전해 진다.
바울의 무덤이라함은 로마의 바울대성당
0,누가
사도 바울의 제자이자 주치의로 추정.-혹자는 노예 출신이었다고 추정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
고향; 안디옥
4복음의 기술가중 유일한 이방인
바울의 2차전도여행중에 처음 언급됨.
바울과 마지막 로마의 위험한 여행에 함께 해
누가만이 나와 함께 있다(디모네후서4:11)고 기록.
고대 그리스문체와 유대의 원전에 지식이 탁월
84세에 아카이아(비타니아 현,이집트)에서 순교 후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터키,이스탄불)로 옮겨졌다고 한다.
터키의 에페수스에 한국어로 세워진 누가의 묘 안내문-그대로 믿고 싶다.
하지만-,너무 소홀히 보존된것 같다.
0,디도
헬라문명권의 안디옥 태생 이방인
사도 바울이 안디옥에서 전도하여 얻은 믿음의 동역자-
바울은 그를 참 아들이라 칭했다.(디도 1:4)
갈라디아 2:1절 바울은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갔다고 쓰여 있다.
그만큼 신실한 아들이었으며
이방인도 전도하면 이같이 된다 자랑할만 했기에 취했던 행동이었던 것 같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파가 나뉘어 어려울 때에 디도를 보내어
첫번째 보낸 편지(고린도전서)의 결과를 알고자 했던 바
디도로부터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고 받고
후서를 아픈 마음에 눈물로 썼고 (고후2:4 ),
근심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적었다.(고후 7:6-11)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그레데 섬에 불시 정박했는데
그때의 정황을 기억하여 디도를 보내어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 한다.
그레데 섬 수도 고틴(현, 고르티스)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고
디도의 무덤위에 지금의 디도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레데섬은 현재의 크레타섬을 말한다.
0,빌레몬
사랑이 있는의 뜻.
골로새 출신
바울의 두란노 서원 출신 제자 중 가장 먼저 교회를 세운자.-골로새 교회
부자여서 자신의 집을 개방해 교회로 사용-
고향 친지인 에바브라,아들 아깁보,아내 압비아가 동역자가 되어 봉사.
바울이 로마로가서 선교할때 노예출신 오네시모를 만나 회심 시켰는데
그는 사실 빌레몬의 노예로서 재물을 훔쳐 빌레몬으로 부터 도망 친 자였다.
바울이 재물을 훔쳐 달아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유인으로 해달라고
당사자 오네시모를 통해 빌레몬에게 보낸 간청의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
A.D.46년 헤롯의 박해때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빌레몬 순교후 오네시모가 골로새교회의 감독의 직분을 맡아 봉사했다 한다
0,바나바
"위로의 아들,혹은 권위자"의 뜻 본명;요셉
구브로의 살라미스(현, 북 키프로스) 출신. 당시 디아스포라 레위족 유태인
초대 공동체에 자신의 재산을 헌납하여 공동체의 분위기를 일신시켰고
그때만해도 꺼리는 사람이었던 사울을 예루살렘 공동체에 소개시켰다.
전도 여행중 바울과 의견 충돌도 있었으나 바울에 못지 않은 지도자였다.
A.D.45년, 고향인 살라미스에 돌아와 포교 중
폭동을 일으킨 유태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시신을 지중해 늪지대에 버렸으나
추종자들에 의해 Carob이라는 나무 밑 동굴에 묻혀 졌다.
혹자는 유태인 마법사에 의해 선동당한 유태인들이 재판정에 넘기자
소요 사태를 우려한 재판관이 목에 줄을 매 성밖으로 끌어내고
화형시키는 와중에 돌에 맞아 순교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키프로스의 살라미나에는 바나바의 무덤과 바나바 수도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