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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특별한 유적지-!하멜 기념관과 병영성터

정의파파 2024. 7. 3. 15:35

강진에는 특별한 곳이 있다.

이름하여 하멜기념관!

1600년대에 유럽인이 억류되었던 장소가 우리나라에 흔한 장소 일까?

1940년대, 이웃 일본은 이미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만들어 미국을 공격했고

400여년 전엔 우리나라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란을 일으켰다.

우리가 창과 칼과 활로 대항할때

일본은 총이라는 신무기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우리 강산을 유린했었다.

 

만일 그즈음 우리가 임진란을 반성하여 적극적으로신문물을 받아들이고

하멜을 비롯한 서양인들과의  교역을 서둘렀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치욕적인 일제의 36년등 가장 격변하는 흐름속에 있었던 1900년대를,

어쩌면 동쪽의 요충에 자리한 우리가 주름잡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호르콤(Gorcom,현재는 호린켐;Gorinchem)"에는

왼 손에 보고서를 들고 오른 손은 동쪽을 가리키는

하멜의 동상이 하벤직( Havendijk)거리에 서 있다(1998년 건립).

 

하멜보고서(하멜표류기)는,

하멜이 조선에 있었던 기간 동안의 임금을 받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제출했던 일종의 청구서----

이 책은 선풍적 인기를 끌어 미지의 동방나라를 서방에 알려준 안내서가 됐다.

병영의 하멜기념관 곳곳에 세워진 동상은 네덜란드의 그것을 흉내낸 동상들---

 

1609년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 주식자본 형태의 암스텔담은행이 설립될 정도로 상업이 발달하여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네덜란드 국영기업인 동인도회사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당시,바타비아)에 만들어 졌다.

이를 기반으로 동남아는 물론 중국,일본, 뉴질랜드,브라질에 지사를 설치하여

17세기 세계 무역의 50% 이상을 독점했다.

 

호르콤시의 문서보관서에는 하멜이 동인도회사원으로 일본으로 항해도중

표류하여 한국에 13년간 머물다 탈출하여

다시 고향에 돌아와 1692년 독신으로 세상을 떠난 사실들이 적혀 있다.

전시장에 세워둔  네덜란드 델프트 도자기에 관한 설명-

향신료등의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겼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를 유럽에 수출하여

유럽에서 직접 청화백자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했고,

유럽의 원근법과 투시도법등의 문화를 아시아에 전달하는 매체가 되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지도

지금도 극성인 태풍이 그때에도 활발했던 모양.

1653년 7월 타이완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하멜 일행이

8월에 태풍을 만나기란 쉬운일-, 

64명중 36명이 표류하여 제주도에 상륙했다.

제주 목사 이원진의 보고로 우리 나라에 먼저 귀화한

네덜란드 출신 얀 얀스 벨테브레(조선명;박연)가 파견되었고

하멜일행은 구금생활중 탈출을 시도했지만 다음해인  6월까지 제주도에 구금.

 벨태브로  (박연으로 개명)에 관한 소개

 

1654년 6월 한양으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사역원(통역관들이 근무하는 곳)에 수용.

효종을 알현하고 일본으로의 송환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친위대인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신분증(호패)과 무기를 지급 받았다.

청나라의 사신에게 구명 요청이 실패하여 1656년 3월 강진 병영에 유배되게 되었다.

 

하멜의 항해 행적

효종은, 당시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와

인조로 부터  왕위를 계승 받아  청나라를 치기위해 북벌을 준비 중이었다.

훈련도감 소속이던 박연을 통해 각종 화기를 개발하고,

특히 네덜란드식 화포인 홍이포(붉은 오랑케의 포)를 개발하였지만

청나라와의 관계가 좋아지자 북벌정책은 빛을 잃게 됐다.

 

하멜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적지가 병영 여러 곳에 있다.

하멜이 자주 들렀던 "수인사" 사진

현대에도 그렇지만 병영 생활중 제초작업도 했던 모양이다.

1663년 하멜 일행이 조선에 온지 10여년-, 

강진 지역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죄수들이 여수,순천, 남원으로 각각 분산 수용되었다.

여수로 가게된 하멜 일행 12명은

화살제작, 방아찧기 ,새끼줄 꼬기는 물론 식량 구걸도 하게 됐다.

 

노역생활에 지친 일행은 탈출을 결심-----,

8명이 배를 구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역사학자 이병도가 번역 집필한 하멜 표류기

당시 하멜이 탔던 것과 같은 모형의 선박

 

하멜이 동인도회사에 보고한  친필 보고서

당시 하멜 일행이 사용했던것과 같은 신발

 

하멜의 탈출후 네덜란드는 우리 조선과 교류를 희망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고---

 

강진군은 2007년에 하멜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하멜의 표류기를 일부 번역해 설명한 그림판

2016년에 시작된 하멜촌 조성사업이 2019년을 목표로 아직 진행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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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병영

사실 이곳 병영을 보러 왔다.

아직 복권공사가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성 안에 있던 집들을 철거하고

학교도 다른곳으로 옮겼다 한다.

이처럼 완벽한 둘레벽을 재현한 장소가 우리나라에 몇군데나 있을까?

병사들이 주거했던 막사와 마굿간등

 

실재 병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하루 아니면 일주일에 한번씩 재현하게된다면

관광자원 -,직업 창출의 하나로 고려해볼만한 사업이 아닐까?.

중국은 장외모 감독이 지휘하여 만든 수많은 쇼가 관광지 곳곳에서 공연되고

심지어는 연기자들을 양성하는 학교가 유치부부터 대학부 또래의 연령층까지,

어떤 곳은  마을 전체가 동원되 고소득을 올리는 곳이 많이 있다.

이 마을 또하나의 자랑-,

개인이 자신이 일생동안 수집하여 만든 개인 박물관!!

이름하여 "와보랑께 박물관"

입장료 2,000원.

옛날 신발,

옛날 등잔-1950년대

초창기의 컴퓨터2000년대 초

롤러를 사용하는 등사기(인쇄용)

풍금(Organ)-1950년대

카메라-1950년대

오래된 국정교과서-1950년대

탈곡기등 농기구-1970년대

제승기-새끼줄 꼬는 기구-1970년대

지게와 뻥튀기

수동 탈곡기-1960년대

제초기---1970년데

꽃상여-아랫 부분은 태우고

상여의 윗 부분을 남겨 동네 사람들이 재사용하였다 한다.

각종 풀무

등사기- 잉크를 뭍혀 롤라로 밀어 학급신문을 만들었던 

어린시절 교무실에서의 기억이 새롭다.

 

이 작은 병영면에 맛집이 하나 있어 소개한다.-"설성식당"

 

한식집-, 돼지 짚불구이와 생선구이

맛갈스러운 음식맛에 항상 사람들이 줄을 선다.

보통 한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맛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