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독일 뮌헨 독일박물관 하이델베르크 그리고-라인강

정의파파 2024. 2. 3. 14:44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넘어 왔다.

국경의 검문소등 통관 절차  같은 것 없이 그냥 이웃 동네 넘어 오는 기분이었다.

국경뿐 아니라 아우토반 전구간에 톨게이트도 없어 무료인데

2015년 이후 부터 통행 요금을 징수한단다.(위키백과)

 

뮌헨-_독일 제3의 도시 

히틀러가 나치에 가입하고 그 리더자가 됐던 곳-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열차 철로의 화물칸에는 그 유명한 독일제 자동차가 가득 하다.

 

유럽은, 몇백년된 건물들을 그냥 문화재로서 보관만 할 뿐 아니라 직접 현재의 청사로 사용한다.

문헨 시청앞은  11시에 맞춰 재연되는 시계탑 인형극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인산인해! 

인형극을 보기 위한 것.(크리스토퍼 대공이 루불린 백작을 무찌르는 이 지역의 역사를 연출.)

 

11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동시에 작은 인형들이 퍼레이드 하듯 나타나 한바탕 전투를 벌인 뒤 사라진다.

인형들과 함께- 이 많은 인파도 어디론가 모두들 사라졌다.

이게 뭐라고 참으로 별난 구경거리였다.

작은 아이디어 하나가 세계 각국의 남녀노소 여행객들을 한자리에 모여들게 했다!!

뮌헨- 맥주  축제가 열렸던  공원광장을 지나  독일 박물관을 향하는 길목

길에 표시된 어린아이와 여자, 그 밑의 자전거 표시는 우리 눈에 익숙치 않은 표시-.

아마도 잔디에 아이들과 자전거가 와도 좋다는 표시인가?

박물관의 뒷문인지 앞문인지--.

아무튼 우리는 현지 가이드를 보내고

자체 해설 가이드를 선임하여 3시간 가량 박물관 내부를 돌았다.

초 현대 과학 문물을 포함하여 옛것 까지-- 정말 잘 짜여진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각 층별 전시 현황과  가능한 입장시간표,  안내도-

뮌헨을 떠나(현지인들은 뮌셴이라고도 한다)  하이델베르그로 향하는 길 고속도 휴게실. 

우리나라 동네 수퍼같은 분위기의 잡화상점-!

여행객들을 위한 기념품도 있었다.

독일 고속도로 휴게실은 기본적으로 self 주유소이고 화장실이  없는 곳도 있다.

화장실 표시를 잘 보고  들어가야 할 듯.

여행사 사장님과, 폴란드 출신 기사-,오스트리아,독일을 돌아 스위스까지 함께 했다.

우리는 비행기로 떠났지만 운전 기사는 어떻게 돌아갈지 궁금해진다.

고속도로변의 집들-. 보통 연한 갈색의 지붕이다.

아우토반!!!!.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 망!

속도 제한이 없는 신나는 고속도로를 상상했는데 그것과는 무관하다!

모든 아우토반의 진출입로 부근은 50km/h -, 그 밖은 100km/h의 속도 제한이 있단다.

잘 정비된 슈넬스트라세  조차도 120km/h까지만 달릴 수 있고

전혀 속도 제한이 없는 구간에서의 속도도 130km/h를 권장한단다.

속도 무제한 구역은 독일 전체 노선의  20% 정도이고 그 구간도 차량의 증가로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전구간이 무료도로인데 2005년 1월부터 12t.이상의 트럭은 통행료를 받고 앞으로 모든 차량에 적용할 계획이라고-.

유럽 각국에서 유입된 차량의 증가로 비용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라는것-.(위키백과 참조)

참고로,

아우토반(Autobahn); 자동차 전용도로

        S반; 철도

            U반; 지하철

슈트라센반(Strassenbahn); 전차를 말한다.

 

오늘 우리가 숙박할곳은 Hemsbach라는 작은 도시로 하이델베르그 북쪽에 있다. 

근처에 호수가 있어  See-,Seehotel 이다.

약간 일찍 도착한 관계로 주변산책을 나섰는데 주변에 가족 농장들이 많다.

작은 규모의 밭에 토마토, 파, 호박 등 채소 혹은 꽃들을 심고 주말에 관리하는 주말 농장 같은 곳들이다.

그런데 그런 곳들이 유기농 local food로 발전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중이란다.

 

다음날 아침-,

어릴적 그토록 노래로  불렀던 로렐라이 언덕을 보러 간다.

그 구간에 "로맨틱 가"도의 환상적 풍광이 펼쳐진다  (마인츠에서 코블렌츠 사이를 ‘로맨틱 가도’라 부름)

 

 헴스바흐를 출발해 고속도로에 들어선 순간-,

이건 독일의 아우토반이 아니다.

서울에서나 볼 수 있는 주차장같은 출근 길-.

계획대로  마인츠에서 유람선을 탈 수 없게 되자 현지 가이드가 조바심을 한다.

그래서 일정을 변경하여 뤼데스하임에서 배를 타기로 했다. 

뤼데스하임 [Rudesheim] 의 뒷 언덕 니더발트 고지에서 바라본 라인강과 포도밭 

 

뤼데스하임 암 라인(Rüdesheim Am Rhein). -독일 서부 헤센 주의 도시.

라인 강 포도주 산업의 주요 중심지로 타우누스 산맥 기슭의 라인가우 지역에 있다.

목조가옥과 좁은 거리, 중세의 여관이 있고,

15세기 마인츠 대주교들의 평상시 거주지였던 에렌펠스 성(1210경) 유적이 가깝다.

9월에 포도주 축제가 열리며, 브랜디와 발포(發泡) 백포도주로 유명.

인구 9,000여명(1989). (다음 브리태니커 참조)

"연인과의 첫키스"처럼 달콤하다고 뤼데스하임에서 포도주를 맛본 괴테가 말했다던가?

그 와인은 좀 있다 마시자고 여행사 사장님이 제안한다.

니더발트 기념비 (Niederwald)-게르마니아 여신상

            보불전쟁 승리와 그 결과 1871년 성립한 독일제국을 기념하여, 1883년에 라인강변에 세운 36m의 청동상.

            (뒷 구릉에는 "니더발트"라는 독일인들이 즐겨 찾는 올레 숲 길도 있다.)

라인강 유람선 카페와 창 밖의 뤼데스하임 풍경

 

뤼데스하임에서 유람선을 기다리는 동안-,

선착장과 가로로 나란한 강변을 따라 운행하는 열차가 지나간다

 "이곳을 열차를 이용하여 관광하는 코스도 있겠구나" 생각한다.

라인강 유람선은 보통

마인츠-뤼데스하임-장크트 고아르스하우젠(로렐라이)-코블렌츠-퀠른의 코스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뤼데스하임에서 시작하여 로렐라이에서 하선하기로 했다

KD라인 유람선 승차권

유람선에서  승객들은 객실에 있질 않고 모두 밖으로 나간다..

 Brug Reichenstein-,

라인강의 고성중 오랜것중의 하나.

13세기 도둑들의 소굴이었던곳!!!   

그후-,1834년 빌헬름 장군이 일대를 구입 사유지로-.

 

아! 선창밖에 강물따라 흘러가는  그림같은 풍경들! 

동화속에 나오는 온갖 성들이 퍼레이드하듯 스쳐 지나간다!!!

이 지역을 Rhineland-Palatinate라 부르는데

현지에서 샀던 그림엽서를 잘라 대표적인 라인 고성들을 올려 봤다. (설명;From Wikipedia) 

Stahleck Castle Koblenz남쪽 50km Bacharach 지역,  

Steeg valley의 초입,   해발160m높이에 세위진 12세기 성. 

로렐라이의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성 주변에는  해자가 설치되어 있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7세기에 파괴되었으나 20세기에 복구되어

현재는 호스텔로 쓰여지고 있다.

 

Gutenfels Castle; 1220년에 건축.일명 Caub Castle이라고도 불림.

팔츠지방(Rhineland-Palatinate) Kaub시 보다 110m 높은 곳에 위치

Pfalzgrafenstein Castle과 함께 Kaub의 방어요새였고,

로마황제에게 바친다는 명목으로 통행세를 징수하는 Toll gate였었다.

독일의 전신 Prussia가 이 성을 매입하고 1년후1867년에 이 통행세 징수는 철패됐다.

2002년 UNESCO세계유산에 등재.

 

Pfalzgrafenstein;  Diether와 그의 아들 Henry 1세가 

1138년 Kaub시 근교 라인강의 작은섬(Falkenau섬 혹은 팔츠랜드섬)에 세운 통행세 징수 성.

강 건너편의 Gutenfels Castle과 협력하여 강을 가로지르는 체인을 설치하고서

20명의 훈련된 인원이 관리하며 통행료를 징수,

반항하는 자들은 물에 설치한 나무감옥에 넣어 복종시켰다  

Ludwig the Bavarian왕에 의해, 윗 부분 5각형의 탑은 1326-1327년, 

6각형의 성벽은 1338-1340년에 보강. 

1477년 로마 County of Katzenelnbogen에서 벗어났고 1607년과 1755년에 보수되었다.

Pfalz 성은 다른성들과는 달리 정복당하거나 자연재해마져 입은적이 없다.

1814년 겨울에는 나폴레옹을 추격하는 Blucher 휘하 Prussian 군대 6만명을 도하시켜

워털루 전쟁의 승리에 일조하기도 했다

1866년 신성로마제국에서 Prussia제국에 귀속되고서 통행세 징수가 중지되고

100여년간 signal station으로 사용.

2002년 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Sooneck Castle  

Saneck ,Sonneck,  또는  Schloss, Sonneck으로도 불려짐. 

MAINZ 가까이 있는 BINGEN 과 Bacharach사이 Niederheimbach  마을 근처에 자리한다. 

1271년 첫 기록이 있음  Aachen 부근 Kornelimunster Abbey (베네딕트수도원) 의 영주에 의해 관리됨

1282년 첫번째 독일왕  Rudolph1세가 점령중 파괴하고 1290년 다시 건축한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왕가에 충성하는  Reitenaour들에게

Sempach전투에서 스위스를 저지할 목적으로 선물로 주었다.

                  * Sempach전쟁; 1386년 7월9일 발생한

오스트리아 Leopold 3세와 구 스위스 연맹 사이의 전쟁--스위스가 승리함. 

1346년 4월 마인츠의 대주교 헨리3세가 Waldeck의 기사 죤에게 영지로 주자, 기사 죤은 성을 다시 건축.

                     죤의 사후 4명의 후계자가 관리(Ganerbenburg= multi-family property)

1553년 Waldeck이 와해되자 Breidbach zu Bürresheim 가문이 단일 소유자가 됐으나 

Breidbach zu Bürresheim family가 몰락하자 Sooneck성도 함께 몰락.

1689년 Palatine Succession 전쟁으로 Sooneck성은

라인강의 왼쪽에 위치한 다른 모든 성처럼 프랑스 루이 14세의 군에 의해 파괴됨.

1774년 마인츠의 대교구가 현재의  Niederheimbach  마을이 된  황폐한 포도원을 임대.

1834-1861 Prussia의 Frederick William4세 왕세자와 그 형제들인 Charles와 Albert가

황폐한 Sooneck성을 사서 사냥터의 오두막으로 사용

              1848년 독일혁명때는 사냥 오두막으로 사용을 금하였다.

1차 세계대전 후 귀족의 영지가 국유화 되자 Sooneck성은 주의 소유가 됨.

2차 세계대전 후  Rhineland-Palatinate 주의 소유로

1948년 "State Ministry of Castles" 의 소유로 됨

 2002년 UNESCO 세계유산에 등재   

 

Katz Castle Rhineland-Palatinate  지역의 St. Goarshausen의 German town 위 쪽에 위치 ,일명 고양이성

1371년경 Katzenelnbogen의 William 2세 백작이 건축

1806년    나폴레온에 의해 폭파됐으나

1896-98년에 개축

현재는 사유지로 방문객을 허용치 않음.

Stolzenfels 성; 라인강 서쪽편 KOBLENZ 가까이에 위치.

      Arnold II von Isenburg(1242-59) 왕자에 의해 방어목적으로 건축.

1259년 완공된후 14세기까지 통행세 징수용으로 사용.

1689년 30년 전쟁때 프랑스와 스웨덴군에 점령당함.

1802년 (9년전쟁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Koblenz시에 귀속

          1815년 (비엔나제국의 통치시대) Prussia의 Frederick William 4세가 라인주변을 여행할 때 프러시아에 증여

          1822년 라인지역은 프러시아의 속지가 됨.

1823년 코브렌즈시가  Prussia의 Frederick William 4세 왕세자에게 선물로 증여.고딕양식으로 재건축 시작

1840년 Prussia의 왕이된 Frederick William 4세는 여름별장으로 쓰면서 무도회 등의 행사에 이용 

1842년 여행 당시 왕자였을때 부터 주변의 경관에 매료됐던 Frederick William 4세는 고딕양식으로 건물과 정원을 완성

UNESCO세계유산에 등재

 

Marksburg성  Braubach 마을보다 높은 지역에 위치한 요새.

1117년 왕실과 Braubach마을을 방어 지원할  목적으로 건축

1231년 언급되기 시작 

1283년 Katzenelnbogen의 Eberhard 백작이 구입한후 14C.-15C.동안 귀족들이 수시로 remodel.

1479년  Katzenelnbogen의 백작들의 지역이 Hessen의 백작에 넘어감.

          나폴레온 말기 감옥으로 사용.

1815년  Nassau의 속지

1866년  Austro-Prussian 전쟁때 Prussia의 소유로.

1900년  1000 골드마르크라는 상징적 값에 일찍이 소유권을 주장 점유해온 German Castle Association에 팔렸다.

1931년  German Castle Association의 본부로 사용.

1945년 2차대전 중 강건너 미군포병의 포격으로 심각한 파손. 

1990년 일본, 남쪽 태평양 미야꼬지마 섬의 우에노 독일 문화 마을에 Markburg와 똑같은 성을 건축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북쪽을 향해-. 라인강은 흘러 내려 간다.

독일의 "아버지강" 라인강은 스위스 알프스의 토마 호수에서 발원하여

오스트리아, 스위스 바젤을 통과, 독일의 쾰른, 뒤셀도르프 등 유럽의 중심을 관통하고-,

마지막 삼각주에서 네덜란드를 해수면 보다 낮게 만든 후

북해에 그 물줄기를 쏟아 놓는다.

총 길이 1,320km.

로렐라이 선척장에서 내려 Rhein gold 라는 간판이 담재이넝쿨로 뒤덮인 식당엘 들렀다. 

식당은 비좁고 볼품없었지만 음식맛은 일품-!

요 몇일간을 통틀어 최고의 솜씨였다.

식당의 벽에는 강이 범람했을떼 집안까지 스며든 물의 높이를 적어 둔 수위표지가 있었다.

1988년에는 출입문 위까지 수위가 표시되어 있는것과 몇년 터울로 범람한 물높이를 보고

물에 누차 침수되어도 이토록 튼튼한 건물과, 자연을 극복하는 그들의 생활 방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Sankt Goars hausen 마을에서 바라본 라인강!

 

드디어 로렐라이언덕-.

잘 정비되지않은  산 언덕 길을 버스로 올랐다.

커브진 강 어느곳에선가 전설의 아가씨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와 주었으면-하는 마음으로

목청껏 "로렐라이 언덕"을 합창한다.

잘 화음된 혼성 합창에 경치를 촬영하던 관광객들이 카메라와 비디오를 우리쪽으로 돌려 댄다.

전설의 소녀 조각상-.

조각상도 볼 품 없었지만 이 언덕 자체가 그 이름만으로 유명한 곳 이라는 걸 보고서야 확인 했다.

이곳 출신 시인 "하이네"는 상상의 이 인물을 미화해 수많은 시를 써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 말이"-로 시작되는 가사에 29명의 작곡가가 편곡을 거듭하여 부르게 된 "로렐라이 언덕"

사실 그 노래의 주인공은  언덕이나 아름다운 아가씨가 아닌 라인강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여행사 사장님이 준비한 뤼데스하임 특산품 레드와 화이트의 와인도

나처럼 아이스크림 좋아하는 비주류에게는 로렐라이 언덕 만큼 별 맛이 없는 그저 쓰디 쓴 소줏잔에 불과 했다.

 

관광유람선;4월 중순부터 10월 하순까지 운행.

  마인츠-코블렌츠-,5시간 소요.

  뤼데스하임-잔크트 고아르(  Sankt Goars hausen 로렐라이 산위 마을)   

뤼데스하임- 빙겐 잔크트 고아르(로레라이 언덕 맞은편 마을)-양쪽 모두 2시간 정도 소요.

 

영어 알파벳 소문자 romantic(낭만적)이아닌 

                    대문자 Romantic(로마 풍의)강변을 버스로 거슬러 올라,(북쪽에서 남쪽으로-) 하이델베르크로 향한다.

신성 로마제국시대에는 각 지역의 특산물과 특히 석탄 연료를 라인강을 따라 운반했다 한다.

하지만 육로가 발달한 현재, 수상교통은 거의 유람선 운항 정도로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바덴뷔르크주 보덴발트 구릉지대에 위치한 하이델베르크는는

2003년 인구14만명의 작은도시에 학생들의 숫자가 3만명에 달할 정도로 교육의 도시---.

1196년에 기록에 처음 등장하여 1720년 까지 선제후 팔츠백작가의 거주지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632년의 30년 전쟁에 패허가 된후

다시 1689년과 1693년에 라인강건너 프랑스인들의 침략으로 파괴되고 1802년 바덴에 양도되었다.

1693년의 침략후 남은 건물은, 성령교회, 마르슈탈(왕실 마굿간),기사회관 뿐이었다.

1786년 건축한 알테다리와 1701년에 건축한 시청-,그리고 1712년에 건축한 예수회교회가 중요 검물로 존재한다.(브리태니커 참조)

하이델베르크성-.

후니쿨라가 있다는데 우리는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이 성을 걸어서 올랐다.

1689년과 93년 프랑스인들의 침략으로 파괴된 후.

1764년 벼락으로 다시 파괴

양 옆면은 오토하인리히 관과 프리드리히 관이 있는데 프리드리히 지하실에는 18만ℓ의 포도주 통이 있다.

"엘리자베스문"

프리드리히5세가 부인 엘리자베스를 놀라게 해줄량으로 하룻밤만에 만들었다는 깜짝 생일 선물!

부부가 손을 잡고 통과하면 금슬이 더 좋아진다나----.

 

이 성은 다른 유럽의 성과는 색다르게 물을 채운 "해자" 대신 성벽과 벽사이의 깊은 공간에 사자등 맹수를 사육하여 적의 침입을 방지했다 한다.

뜰 한쪽에 괴테의 기념비-."난 행복했노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곳에서-"라는 연시가 적혀 있었는데 80세의 괴테가 16세의 소녀에게 썼던 시라 한다.

 

하이델베르크대학-,

루페레히트 카를대학교라 부는다-루페르트1세가 세우고 1386년 교황 우르바누스6세의 인가를 받았다

고생물학연구소에는 교과서와 시험에 자주 등장했던

호모 에렉투스(Homo electus)로 분류되는  "하이델베르크인의 하악골"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학생감옥"? 이던가?

1712년 부터 1914년 까지 경찰이 대학당국에 경범죄를 저지른 학생들을 일임시키자, 학교 당국이 설치한  학생감옥이란게 있었는데

당시 학교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고 한다.

3일간의 금고 시간을 오히려 명예로 생각한 학생들이  일부러 나쁜짓을 저질러 들어온 학생들도 있었다고-,

점심때 들른 식당-,독일인들 량에 맞추어 주는 닭요리가 너무 많아 다 먹지못했다

화장실 찾아 지나는 뒷 마당에 덩그랗게 놓여 있는 옛날 펌프!

물을 붓고 두 손으로 손잡이를 힘껏 눌러, 속에 들어 있는 고무 박킹의 작용으로 물이 올라오는, 우리나라에서 1960년초 부터 1980년 까지 사용했던 정겨운 물건이다.

참새가 방앗간 옆을 그냥 지나칠수야--,

우리는 또 그 펌프를 주제로한 노래--,"농가의 펌프"를 합창한다.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님 함께 집에 오는데 x 2

----(후렴)농가의 곡간옆 녹슬은 펌프 손잡이 반이 부러져 나간

              나사가 빠지면 나무를 끼는 농가의 곡간옆 펌펌펌!!"

카를테오도어 다리에서 철학자의 길쪽을 배경으로-.

건너편에 철학자 헤겔,야스퍼스등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재직시에,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가 자주 거닐었다는 숲과 길이 있는데

아마 이곳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산책을 즐기는 칸트를 "시계"라  별명 붙였을까?

칸트는 이곳에서 길을 걸으며 "순수이성비판"을 생각했을것 같다.

하이델베르크의 상징인  "코른마르크트광장 성모상"

네카어강을  가로지른 카를 테오도어다리 -,뒤에 하이델베르크성 전체가 보인다.

 일명 옛다리-

다리주변에 있는 멍키(monkey) 동상 밑에는 생쥐 두마리의 동상이 있다.

큰 걸 만지면 아들을 작은걸 만지면 딸을 낳는 단다.

이 쪽의 숙소들은 호텔같은 팬션이 많은것 같다. 팬션이지만 호텔같은 곳.

벽에 걸어진 T.V.가 보여주듯 소박한 느낌이지만 어쩐지 정겹고 집처럼 느껴졌었다.

 

숙소 주변을 산책 하는데 길가에 아이들 주먹만한 사과들이 떨어져 있다. 

우리나라 시골에 감나무처럼 흔한게 이곳은 사과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만일 뉴튼이 우리나라 농촌에 살았더라면 떨어지는 감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으리라-,

또한 스피노자가 우리 농촌에 살았더라면

 "만일 오늘이 지구의 마지막 날 일지라도 나는  한그루의 감나무를 심겠노라" 말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숙소 공중전화에서 이곳 뒤셀도르프던가?에 유학중인 고향 후배에게 전화를 시도해 보는데 도통 되질 않는다.

보다 못한 대기중이던 아린 아이 하나가 대신 전화를 걸어줘 간신히 통화를 했는데

전화 한 통화도 매끄럽게 할 수 없는 이방인의 처지가 새삼 딱하게 느껴졌다.

 

내일은 스위스로 넘어간다.